[행성역사위원회] 16화

2018-09-28 17:48
행성역사위원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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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16화
너는 누구냐?(2)

이슬휘는 약속 장소로 나갔다.
길에 서 있으니 차가 하나 다가왔다.
차창이 열리면서 형준이 소리쳤다.
“이슬휘 씨, 얼른 타세요!”
이슬휘가 차를 타자 박형준이 가볍게 인사를 했다.
하지만 아슬휘는 박형준과 그런 인사나 나누고 있을 기분이 아니었다.
“당신 정체가 뭐야? 당신 학생이라는 거 가짜지? 교수님들도 당신 아는 사람이 한 분도 없던데. 그리고 앤지 씨는?”
박형준이 이슬휘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아, 좀 차근차근 이야기합시다. 그리고 내 신분이 뭐가 그리 중요합니까? 어차피 이슬휘 씨도 가짜 아닌가요?”
박형준이 웃음기 가득하게 말했지만 이슬휘는 충격과 놀라움에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뭐?”
“나는 이슬휘 씨를 도우려는 거니까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어디 조용한 데다 차 좀 세우고 차분히 이야기해 봅시다.”
박형준이 이슬휘를 힐끗 보며 말하고 다시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이슬휘는 겨우겨우 분을 삭이며 형준의 옆얼굴을 노려봤다.

***

형준은 이리저리 차를 돌리다가 강변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밤이라서 차들도 별로 없었고 오가는 사람도 없었다.
“혹시 미행하는 놈들이 있을까 봐서요.”
이슬휘는 그 말에 또 폭발했다.
“미행이라니? 누가? 왜?”
박형준은 차의 시동을 끄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는 이슬휘의 물음에 대꾸하지 않고 눈을 감았다.
이슬휘는 기분 같아서는 그냥 확, 한 대 치고 싶었지만 꾹꾹 눌러 참았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뒤 박형준이 말을 꺼냈다. 눈을 감은 채였다.
“이슬휘 씨. 내가 만약 당신이 애타게 찾는 앤지 씨를 데려다주면 이슬휘 씨는 내게 뭘 해 주실 겁니까?”
이슬휘가 소리쳤다.
“뭘 해 주다니? 널 곱게 놔두는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 알아!”
형준이 눈을 뜨며 슬휘를 쳐다봤다.
“쯧쯧, 협상의 기본을 모르시는군. 기브 앤 테이크, 몰라요?”
“좋아, 그럼 내가 줄 수 있는 건 다 주지. 당신이 원하는 게 뭔데?”
“당신의 임무에 대한 모든 것. 그리고 당신 집에 있는 타임머신.”
“뭐, 뭐? 당신 누구야? 그걸 어떻게 알지?”
이슬휘는 펄쩍 뛸 정도로 놀라며 물었다. 이슬휘의 목소리가 약간 떨려 나왔다.
“아까도 말했잖아요?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내 제안에 ‘예스’만 하시면 앤지 씨를 돌려 드리지요.”
“그, 그건…….”
이슬휘는 신음을 깨물었다.
아무리 앤지를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타임머신을 내어줄 수는 없었다. 그건 말이 안 되는 소리였다. 그렇다고 ‘노’를 하면 앤지에게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단 시간을 끌면서 기회를 엿봐야 한다.
“좋아. 그럼 먼저 앤지 씨가 안전한지 확인부터 해야겠어. 앤지 씨는 지금 어디 있지?”
“그럼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건가요?”
박형준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때였다. 대형 승합차 한 대가 근처에 와서 섰다.
박형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박형준이 이슬휘에게 빠르게 말했다.
“얼른 내려요.”
두 사람이 차에서 내리자 승합차의 문도 급하게 열리며 사람들이 우르르 내리기 시작했다.
박형준은 이슬휘를 잡아끌어 승합차와 반대편 차 뒤로 몸을 숨겼다.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박형준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이슬휘가 힐끗 보니 레이저 권총이었다.
박형준이 다가오는 사람들을 향해 레이저 권총을 쏘아 댔다. 달려오던 사람들이 흩어져서 자동차, 쓰레기통 뒤로 몸을 숨겼다.
이슬휘가 여태까지보다 더 놀라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당신 진짜 누구요? 위원회에서 온 사람?”
박형준이 고개를 빼꼼 내밀어 상대방의 동태를 살피며 말했다.
“난 감찰국 소속의 현장 조사 요원입니다. 이번 당신 관련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 나왔고요.”
“아니, 왜 그럼 진작 그렇게 말하지 않고…….”
“우리는 신분을 노출하면 안 되는 거 아시면서.”
“그럼 저들은 누굽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제가 지구에 왔을 때부터 계속 저를 미행하더군요.”
그때 그들이 일제히 공격을 시작했다. 레이저 빔이 차에 맞으며 불꽃을 일으켰다.
“저들도 레이저 총을……?”
이슬휘가 놀라서 소리치자 박형준이 무심하게 말했다.
“제가 여기 온 걸 알 정도면 행성연합과 관계있을 테니 무기도 조달 가능했겠죠.”
박형준이 총을 쏘며 이슬휘에게 말했다.
“총 가져오셨죠? 좀 도와주실래요?”
이슬휘는 그제야 생각난 듯 주머니에서 총을 꺼냈다.

***

전투의 양상은 상당히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이슬휘 쪽에서는 적이 몇인지도 모르고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대충 방향을 짐작해서 총을 쏠 수밖에 없었지만, 적은 차 뒤에 숨어 있는 확실한 타깃이 있으니 공격이 수월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 형준을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모든 일들과 특히 앤지에 대한 소식이 궁금했지만 이런 상황에서 물어볼 수도 없었다.
“여기 이렇게 있다가 둘 다 죽겠어요. 일단 흩어집시다. 그래서 나중에 다시 만나기로 해요.”
이슬휘가 차 뒤에서 몸을 웅크리고 박형준에게 말했다.
총을 한 방 쏘고 몸을 웅크린 박형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좋겠어요. 기다리시면 제가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이슬휘와 박형준은 서로 반대방향으로 몸을 굴렸다.
이슬휘는 약 100미터 거리의 매점을 목표로 했다. 그쪽은 밝았고 차들도 몇 대 주차되어 있었다.
거기까지만 가면 차를 얻어 타든 훔쳐 타든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닥을 몇 바퀴 구른 이슬휘는 거리가 좀 멀어졌다고 생각되었을 때 벌떡 일어나 냅다 달렸다.
그 순간이었다, 뭔가 뜨거운 것이 허벅지를 때리며 살을 후벼 파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그러면서 다리에 힘이 빠져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하필이면 제방 쪽으로 넘어진 이슬휘는 제방 아래로 굴러 강물에 빠지고 말았다.
이슬휘는 강물에 몸을 맡기고 한참이나 하류로 떠내려갔다.
가면서 보니 어느 순간 레이저 빔의 불빛이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박형준은 무사히 빠져나갔으려나…….’
이슬휘는 한참을 더 간 다음에 제방으로 올라와 허벅지를 살펴보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손가락 굵기의 구멍에서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이슬휘는 손수건으로 허벅지를 묶어 지혈하고 다리를 절뚝이며 도로로 나갔다.
타겠다, 못 태워 주겠다 실랑이를 벌이다 몇 대나 빈 택시를 보내고 겨우 웃돈을 주고 택시를 탔다.
이슬휘는 뒷좌석 깊숙이 몸을 기댔다. 피곤이 한꺼번에 확 밀려왔다. 하지만 머릿속은 어느 때보다도 복잡했다.
앤지, 감찰국의 현장 요원, 거기다 역사를 자기네 마음대로 바꾸려는 사람들까지……. 도대체 이 일이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가.

***

이슬휘는 집에 도착해서 젖은 옷을 벗어 놓고 응급 치료 키트를 꺼냈다.
지구에 온 이후로 처음 사용해보는 것이었다.
상처를 소독하고 ‘ㄱ’자 손전등처럼 생긴 휴대용 치료기를 상처 가까이 대고 전원을 켰다. 치료기에서 나오는 따뜻한 빛을 상처에 쏘이자 차츰 상처가 아물어 갔다.
손으로 만져 봐서 상처가 완전히 아문 걸 확인하고 이슬휘는 샤워를 했다. 따뜻한 물이 온몸을 씻어 내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이슬휘는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형준에게 전화를 했다.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았다.
혹시 잘못된 건가…….
[나는 무사히 집에 도착했음. 문자 확인 즉시 연락 바람.]
이슬휘는 문자를 발송하고 소파에 비스듬히 누웠다.
한쪽 벽에 조각조각 붙여 놓은 앤지의 계통 트리가 보였다.
1330년에서 시작해서 300년을 내려왔는데 관련 인물이 수십만 명이 되었다. 현재까지 오면 70억 지구인이 다 관련 인물일지도 몰랐다.
결국 이슬휘는 계통 트리로 앤지의 관련 인물을 찾는 건 포기하고 말았다.
이제 기대할 것은 형준이 가진 정보뿐이었다.
근데, 감찰국에서 자기에게 ‘주의’ 징계를 내림으로써 모든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왜 현장 조사 요원을 파견했을까?
그리고 앤지를 미끼로 자기를 떠보려고 한 듯한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박형준은 정말로 앤지의 행방을 알고 있는 것일까?
우리를 공격한 그 사람들은 도대체 누굴까?
궁금한 건 많았지만 이슬휘 혼자서는 풀 수 없는 문제들이었다.
이슬휘는 박형준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

밤새 기다렸지만 박형준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문자에도 답이 없었다.
그러다 새벽녘에 한 통의 문자가 왔다.
[지금 상황 수습 중. 연락할 때까지 기다리시오.]
그제야 이슬휘는 겨우 눈을 좀 붙일 수 있었다.
이슬휘는 낮에 깨어 박형준의 연락을 기다리는 동안 집 안팎에 설치해 둔 CCTV의 화면을 확인해 봤다.
예상대로 집 안의 모든 카메라는 작동 불능 상태가 되어 있었고 녹화된 화면도 없었다.
하지만 집 밖 가로등에 설치한 CCTV는 아주 선명하게 대문 앞을 보여 주고 있었다.
화면에는 이슬휘 자신이 제일 많이 등장했고 지나가는 사람들, 대문 앞길에서 공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있었다.
빠르게 화면을 넘기던 이슬휘는 한 곳에서 화면을 정지했다.
자기가 집에서 나오고 얼마 후 집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이 있었다. 들어갔던 사람은 한참 만에 다시 나왔다. 머리에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어 얼굴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이슬휘는 날짜와 시간을 기록하고 계속 화면을 넘겼다.
한참을 넘기자 그 사람이 또 한 번 화면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들어가서 한참 만에 다시 나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지나가는 차를 피하기 위해 고개를 약간 돌렸다.
슬휘는 그 순간을 정지시켜 화면을 확대했다.
얼굴이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났다. 이슬휘는 고개를 갸웃했다. 낯이 익은 얼굴이었다.
이슬휘는 그 얼굴을 저장해 놓고 다시 화면을 돌렸다. 더 이상은 특별한 게 없었다.
이슬휘는 저장해놓은 얼굴을 화면에 띄웠다.
너는 누구냐?
그런데 집에 들어온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집에 들어와서 무얼 하고 간 것일까?

***

드디어 박형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요? 괜찮은 겁니까?”
이슬휘가 다급하게 말했지만 형준은 침묵을 지켰다.
“뭐야. 여보세요, 박형준 씨?”
통신 감도가 안 좋은 줄 짐작한 이슬휘가 목소리를 높이자 상대방이 느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박형준 씨를 찾는데 미안합니다. 저는 박형준 씨가 아니군요.
“네? 그럼 누구시죠? 혹시 전화기를 주우셨나요?”
이슬휘가 목소리를 낮추며 예의를 갖춰 물었다.
―뭐……. 주운 거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그나저나 이슬휘 씨? 저희가 좀 뵙고 싶은데……. 가능하시겠죠?
이슬휘의 머리가 바삐 움직였다.
“혹시 박형준 씨가 어떻게 된 겁니까? 당신들 혹시 그때……?”
―박형준이란 사람한테서 어떻게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는 이슬휘 씨를 돕고 싶고 또 함께하고픈 사람들입니다. 뵐 수 있을까요?
“당신들은 그날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거 아냐? 근데 뭘 돕고 뭘 같이해?”
―그날은 이슬휘 씨도 알다시피 피차 상황이 그렇게 된 것일 뿐, 우리는 이슬휘 씨를 죽일 생각은 전혀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박형준……. 그 사람은 이슬휘 씨를 조사하러 왔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상대방이 전혀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바람에 이슬휘의 목소리도 낮아졌다.
“물론. 당신들은 모르겠지만 이번 사건을 조사하러 나왔다는 건 알고 있소.”
―앤지 씨 실종과 관련된 사건들 말인가요?
이슬휘는 갑자기 숨이 콱 막혔다.
“당신은 앤지 씨를 어떻게 아시오?”
―우리가 보호하고 있으니까.
“당신들이 앤지 씨를 보호하고 있다고?”
―그래요. 그러면 이제 우리와 만나야 할 이유가 생긴 건가요?
이슬휘는 앞뒤 가릴 것 없이 바로 대답했다.
“그래요, 봅시다. 언제, 어디서 볼까요?”
상대방은 시간과 장소를 알려 주고 전화를 끊었다.
이슬휘는 전화기를 내려놓고 인상을 쓰며 한숨을 내쉬었다.
너는 또 누구냐?

나비의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