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성역사위원회] 23화

2018-10-01 10:09
행성역사위원회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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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일리게임] 23화
황금 보검

453년 가을.
아틸라의 표정은 어두웠다.
결코 결혼을 앞두고 있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대왕께서는 어찌 그리 안색이 안 좋으십니까? 내일 저녁이 결혼식인데 즐겁지 아니하십니까?”
아틸라는 고개를 돌려 문으로 들어서는 사람을 쳐다보았다.
“오, 수리아. 나의 충직한 부하 아닌가? 그래 이 밤에 어쩐 일인가?”
“기억하십니까? 오래전에 대왕께서 조상의 조상을 찾겠다고 동쪽으로 사람을 보낸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래, 그런 적이 있었지. 그런데? 그 사람이 돌아오기라도 했나?”
“그 사람은 이미 죽었다고 합니다. 대신 동쪽 끝에 있는 나라에서 대왕께 사신을 보내왔습니다.”
“그래? 동쪽 끝에 있는 나라? 거기가 우리와 같은 형제인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지금 밖에 있으니 불러서 물어보시지요.”
“그래, 그럼 어서 부르도록 해라.”
아틸라는 기분이 좋아졌다.
호노리아를 두고 엉뚱하게 일디코라는 여자와 결혼하게 되어 기분이 썩 내키지 않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판단해 보면 호노리아 대신 일디코와 결혼하는 것이 훈 제국의 장래를 위해서도 나은 길이었다.
일디코와의 결혼을 통해 게르만족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그러면 앞으로 있을 로마와의 일전에서 2년 전 카탈라우눔과 같은 치욕스러운 일은 없을 터였다.
“대왕께 인사드립니다.”
아틸라의 상념을 깨는 목소리가 들렸다.
두 명이 수리아와 함께 들어와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대들이 동쪽 끝 나라에서 온 사신들인가?”
“그렇습니다. 신라라고 하는 나라입니다. 페르시아를 지나고 인도를 지나고 차이나를 지나서 있는 나라입니다.”
“오호, 그렇군. 정말 먼 나라로군. 근데 그 나라가 우리 조상의 조상과 관계가 있어 날 찾아온 건가?”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왕이 대왕의 사신을 맞이하여 이야기를 듣고 아주 반가워하면서 저희를 이리로 보냈습니다. 안타깝게도 대왕의 사신은 오는 도중에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래, 그렇군. 그럼 내게 우리 조상의 조상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겠나?”

***

아틸라는 사신들을 편하게 앉게 하고 음식을 가져오게 해서 먹게 하였다.
음식을 다 먹은 사신들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원래 우리 종족은 동북쪽, 그러니까 차이나의 북쪽에 있는 신성한 호수 주변에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다 차츰 남쪽으로 내려왔는데, 쇠를 다루는 기술이 뛰어나 쇠를 나타내는 이름으로 불리었고, 차이나에서는 흉노라고 불렀습니다. 그 흉노라는 이름에서 지금 대왕의 종족을 나타내는 훈이 나온 것입니다.”
“오, 그렇군. 그리고?”
“네. 그 흉노족이 여러 사정으로 인해 동과 서로 서로 나누어졌는데 동으로 간 세력은 지금 저희 신라가 되었고, 서로 간 세력이 바로 대왕의 훈 제국이 된 것입니다.”
“아, 그렇게 된 것이군. 결국 신라와 우리가 한 조상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군.”
아틸라는 자기의 뿌리에 대해서 이것저것 많은 질문을 했다.
사신들은 침착한 모습으로 아틸라의 질문에 하나하나 자세한 답변을 해 주었다.
아틸라의 궁금증은 밤을 꼬박 새게 만들었다.
아침이 되었다.
아틸라는 밖이 환하게 밝아오고 수리아가 방에 들어오자 그제야 질문을 멈추었다.
“오늘 저녁에 내 결혼식이 있다네. 자네들을 내 손님으로 초대하니 결혼식에 와서 보시게. 그리고 내일 또 우리 조상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시게. 참, 그리고…….”
아틸라는 수리아를 쳐다봤다.
“수리아. 가서 내 황금 보검을 가져오게.”
이유를 눈치챈 수리아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대왕, 그건 대왕의 승리의 상징입니다. 그 검이 있어 로마가 대왕을 두려워하는 걸 모르십니까? 전쟁의 신 아레스의 검이라고…….”
“나는 이제 그 검이 없어도 충분히 이길 수 있다네. 나는 이제 그 검을 내 형제의 나라에 선물로 주고 싶어. 내 형제의 나라 신라가 주변 나라들을 잘 제압해서 크고 훌륭한 나라를 만들기를 바란다네.”
오랜 실랑이 끝에 마침내 수리아는 황금 보검을 가지고 왔다.
아틸라는 그 검을 받아들고 한참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그러고는 사신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내가 형제의 나라에 주는 내 마음의 선물일세. 내가 이 검으로 이렇게 강대한 나라가 된 것처럼 신라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네.”
사신들은 바닥에 납작 엎드려 감사의 인사를 했다.
“대왕의 은혜는 저희 왕도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

아틸라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신라의 사신도 한쪽에 자리를 차지하고 결혼식을 구경하고 있었다.
사신은 바로 이슬휘와 앤지였다.
“아틸라 왕은 책에서는 아주 난폭하고 잔인한 왕이었다고 봤는데 전혀 안 그런데요?”
앤지가 아틸라를 쳐다보며 이슬휘에게 물었다.
“그거야 유럽이 세계 역사의 주류가 되면서 그렇게 쓴 거죠. 자기네들을 정복한 사람을 좋게 표현했겠어요?”
“그렇군요…….”
“근데 아틸라 왕의 표정이 계속 안 좋던데, 혹시 오늘 밤 일을 미리 짐작하고 있는 걸까요?”
아틸라는 그날 밤 일디코에 의해 독살되는 것이었다.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아요. 다만 호노리아를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닌가 싶어요.”
“호노리아는 아틸라 왕을 이용한 게 아니었나요?”
“처음에는 두 사람이 모두 서로를 이용했죠. 그런데 시간이 벌써 몇 년이나 지났잖아요? 그러면서 알게 모르게 서로에 대한 정이 생긴 것 같아요.”
앤지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아하, 싸우면서 정든다는 말?”
“하하, 좀 비슷하네요.”
“어쨌든 안 됐네요. 어쩔 수 없이 결혼을 하는데, 바로 그 여자에 의해 독살을 당하다니. 비극이에요.”
“어쩌겠어요, 그게 역사인 걸요.”
“저는 마음이 아파서 더 못 보겠어요. 우리는 언제 떠나는 거죠?”
이슬휘가 탐지기를 보았다.
“안 그래도 슬슬 떠날 때가 되었네요. 자, 가시죠.”
두 사람은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모두들, 한 사람만 빼고 흥에 겨워 술잔을 기울였다.
한 사람, 아틸라는 울적한 기분을 달래려고 술잔을 비웠다.
그러는 동안 모두는 빠르게 취해 갔고 슬휘와 앤지는 누구의 관심도 받지 않고 아틸라의 성읍을 빠져나왔다.
“이제 어디로 가죠?”
앤지가 말 위에서 물었다.
이슬휘가 한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 산으로 가면 진짜 신라 사신을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신라 사신은 오다가 길을 잘못 들어 하루를 늦어버리는 버그가 발생했던 것이다.
그러니 미리 신라 사신을 만나 길을 잘못 들지 않도록 해 주어야 했다.
하지만 앤지와 함께 재미있는 일을 만들어 보려고 이렇게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여태껏 이슬휘가 해 왔던 것처럼 이렇게 약간 고친다고 해서 역사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

“여기서 기다릴까요?”
이슬휘는 앤지를 말에서 내려 주었다.
이슬휘는 능숙한 솜씨로 마른 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우고 앤지가 앉을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말 등에서 뚤뚤 말아 놓은 가죽을 펴서 앤지의 어깨에 덮어 주었다.
“밤에는 많이 추워요.”
두 사람은 모닥불을 가운데 놓고 마주보며 앉았다.
모닥불 불빛이 일렁이며 두 사람의 얼굴색을 붉게 물들였다.
“슬휘 씨. 혼자서 다닐 때는 어땠어요?”
이슬휘가 가볍게 웃었다. 따뜻한 웃음이었다.
“혼자 다닐 때는……. 사실 전에는 아무런 감정이 없었어요. 그냥 임무만 생각했죠. 그러다 언제부터던가……. 혼자라서 외롭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당신 생각을 했어요.
그 말이 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맞아요. 혼자는 참 외롭죠…….”
앤지가 혼잣말처럼 대답했다. 그러다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도 늘 혼자였어요. 어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일하러 가시면 전 늘 혼자서 하늘을 보며 놀았어요. 중고등학교 때는 친구들이 학원 갈 시간에 혼자 집에서 공부하느라 늘 혼자였고, 대학 때는 아르바이트하느라 또 늘 혼자였어요. 회사 들어가서는 아픈 엄마 병 수발하느라 또 혼자였고요.”
“아, 그러셨군요.”
이슬휘는 뭐라고 위로의 말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젠 내가 곁에 있으니 걱정 말아요.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러다 이제 슬휘 씨를 만나 같이 있으니 너무 좋아요.”
앤지가 수줍게 웃으며 말했다.
이슬휘는 깜짝 놀라며 앤지를 쳐다봤다.
앤지도 자기를 좋아할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앤지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묘하게 좋았다.
이슬휘의 얼굴이 모닥불 불빛보다 더 붉어졌다.
이슬휘는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며 웃음을 억지로 참았다.
감사합니다.
이슬휘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무작정 감사 인사를 했다.

***

“혹시 신라에서 오는 사신들입니까?”
어둠 속에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이슬휘가 물었다.
사람들은 갑자기 들려오는 신라 말에 깜짝 놀라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아니, 뉘시기에 우리 신라 말을 하시오?”
“우리는 신라 사람은 아니지만 어쩌다 신라 말을 배우게 되었다오.”
사신들이 말에서 내리며 모닥불 주위로 다가왔다.
“근데 무슨 일이시오? 우리가 올 걸 알고 계셨소?
“혹시 아틸라 왕을 만나러 가시는 길이 아니오?”
“맞소이다. 그걸 어찌 아셨소?”
“이렇게 만나게 되어 다행이군요. 저희는 아틸라 왕의 명령으로 여기서 당신들을 기다렸다오.”
“아틸라 왕이? 우리가 올 걸 어떻게 아셨답니까?”
“그런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셨겠소? 우린 그저 명령에 따라 나왔을 뿐이오. 일단 불가에 좀 앉으시오. 먼 길에 피곤하실 텐데.”
사신들이 모닥불 주변에 옹기종기 앉았다.
이슬휘가 그들에게 말했다.
“사실은 아틸라 왕은 오늘 많이 아프시다오. 그래서 주변에 사람이 접근하는 걸 막고 있답니다. 그런데 멀리 신라에서 손님이 오신다는 걸 알고 이렇게 우리를 보냈다오. 혹시 손님들이 자기와 대면했다가 병이 옮을까 봐 걱정하신 거지요.”
“아, 그렇군요. 많이 위독하신가요?”
“네, 좀 심각한 상황입니다. 그건 그렇고 자, 이거…….”
슬휘는 품에서 아틸라 왕의 편지를 꺼냈다. 밀랍으로 인장을 찍어 봉한 편지였다.
사신 한 명이 그 편지를 받아 갈무리했다.
그걸 지켜보던 이슬휘가 이번에는 큰 나무 상자를 사신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사신은 상자를 받으면서 물었다.
“열어 보십시오.”
사신이 열어 보니 황금과 보석으로 만든 보검이 들어 있었다.
사신은 조심스럽게 보검을 꺼냈다.
“그건 아틸라 왕께서 적들을 물리치고 제국을 건설할 때 지니고 있던 황금 보검입니다. 아틸라 왕은 그 보검을 형제의 나라인 신라왕께 드린다고 했습니다. 그 황금 보검을 가지고 주변 나라들을 물리치고 강한 나라를 만들기 바란다고도 하셨고요.”
사신들은 편지와 황금 보검을 받아 들고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슬휘와 앤지는 그들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한참을 쳐다봤다.
“여기 오기 전에 저 황금 보검이 출토되었다는 기사를 찾아봤어요. 신라의 미스터리라고 표현했더군요. 저게 어떻게 해서 신라까지 오게 됐는지 알 수가 없다고…….”
“과거에는 기록 자체가 잘 안 되었고, 기록된 것들도 분실된 게 많으니까요. 그래서 역사적으로 비어 있는 부분이 많죠. 근데 역사란 그렇게 비어 있는 부분이 있어야 재미가 있어요. 호기심과 상상력이 거기서 시작되니까요.”
“그러게요. 그러고 보면 역사는 참 재미있어요. 물리 다음으로요.”
“어? 저는 역사 다음이 물리인데요?”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나비의꿈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