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마 마스터] 23화

2019-02-18 11:35
카르마 마스터 표지
카르마 마스터 표지
[데일리게임]
목소리가 다시 부정했다.

“아니야. 나, 틀려.”

게이머도 아니고 엔피씨도 아니라면…… 아 혹시.

떠오르는 것을 물었다.

“혹시 너 전신불수 환자야?”

“전신불수가 뭐야?”

“그러니까 몸이 아파서 꼼짝도 할수 없는 사람.”

“아니야. 나, 틀려.”

그녀의 대답에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이도저도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나, 신. 이 세계, 만들었어. 한상이 말했어. 나, 신.”

헷깔려하고 있는 것도 잊을만큼 충격적인 한 마디에 나는 순간 몸이 굳는 듯 했다.

“한상? 우리 형 성한상 말이야?”

“성한상, 맞아. 한규의 형, 맞아.”

“너 우리 형을 알고 있어?!”

“응, 알아.”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나도 모르게 언성이 거칠어졌다. 대답하는 목소리에 가벼운 떨림이 느껴진다.

“나는 엘베로사.”

겁을 먹은 모양이다. 목소리만 어린게 아니라 정말 어린애인 모양이었다.

플레이어는 아닌 것 같았고, 아무래도 엘베로사라고 하는 저 목소리의 주인은 전신불수 환자인 모양이었다. 생각해보니, 아주 어렸을때부터 전신불수였다면 자신이 병에 걸린것도 모르고 사는게 당연했다.

형을 아는것도 이상할 것은 없다. 형은 게임 제작자로서 환자들과 한번쯤은 이야기를 해 봤을테니까.

“소리질러서 미안해.”

상대가 어린애라는 것을 안 이상 굳이 열을 낼 필요는 없다.

“무서운거, 싫어.”

“알았어. 그런데 이거 어떻게 된거야? 전부 멈춘 것 같은데…… 혹시 왜 이러는지 알아?”

“내가, 했어. 에헴.”

자랑스러운 목소리로 헛기침을 한다.

“네가? 어떻게…….”

“나, 신. 전부 할 수 있어. 하지만 전부 할 수 없어.”

불쌍한 것. 한국말도 제대로 못한다. 말도 떼기 전에 병에 걸린 모양이다.

“어떻게 한건지 모르지만 정상으로 돌려 놔. 이러다가 너 GM한테 걸려서 혼난다.”

“아직 안돼. 할거야, 이야기.”

엘베로사의 말이 이어졌다.

“한규, 계속 샹그릴라 해야 해. 나 잘못했어. 한상, 아직 말하면 안돼.”

“있잖아 엘베로사.”

“응?”

“게임속이라서 잘 모르는가본데 우리형…… 사고를 당했어.”

입밖에 내자니 씁쓸한 기분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형은 이제 아무도 만날 수 없어. 너도 이제 형을 못만나.”

“한상, 못만나. 나도 알아.”

엘베로사가 답한다.

“그래. 그러니까…….”

“그러니까 한규, 계속 샹그릴라에 있어야 해.”

문득 왜 이 게임속으로 다시 돌아왔나 하는 것이 떠올랐다. 아마도 이런 것 때문일 것이다.

여긴 형이 만든 세상이다.

그리고 형의 모든 것이 녹아있다. 생면부지의 어린소녀가 형의 이름을 부른다. 이거야 말로 형이 이 세상에 있었고, 또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이 게임이야 말로…… 형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계속 할게. 하긴 현거래로 용돈이나마 만들 수 있게 되면, 그것도 나름 도움이 될테니까.”

“한규 계속 해.”

“알았어.”

“티아메트 만나.”

“티아메트가 뭔데?”

“켈드리안 산맥 살아. 가장 강한 드래곤. 나도 한상, 못 만나.”

엘베로사의 말은 문맥이 엉망진창이었다. 나는 적당히 가감해가며 그녀의 이야기를 정리했다.

“켈드리안 산맥에 있는 강한 드래곤이라고?”

“티아메트 묶여있어. 나도 못 만나.”

“오케이. 나중에 레벨이 높아지면 그쪽으로도 모험을 가 볼게.”

내 말에 엘베로사가 답한다.

“티아메트 빨리 만날 수 있어.”

“그건 또 무슨 말이야?”

“한상 칭찬했어. 전부한큐 강하다고.”

“응? 전부한큐? 아아 그건 ‘무림비혈사’라는 다른 게임속 내 캐릭터야. 샹그릴라속 한큐는 이제 1렙짜리고. 가장 강한 드래곤 같은거 만나려면 모르긴 몰라도 만렙찍고도 파티 맺고 가야할걸?”

내 말을 알아듣기는 한걸까? 엘베로사가 또 딴청을 피운다.

“똑같이는 못 옮겨. 그치만 옮겨.”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하지만 엘베로사는 제대로된 설명도 없이 작별을 고했다.

“시간, 끝. 나, 가야해.”

아마도 설정된 8시간 플레이시간을 다 채운 모양이었다.

“그래, 잘 가. 그리고 이런 장난은 치지 마. 잘못하면 운영진 한테 불이익 받을수도 있으니까.”

“나, 신. 세계 안에서는 나 못만져.”

“그래그래, 알았어.”

적당히 엘베로사의 말에 장단을 맞춰주었다.

“그럼 다시만나. 한규.”

“알았어. 다시보자, 엘베로사.”

미풍이 불었다.

다시 사원을 감싸고 있는 넝쿨의 이파리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조금 떨어져 있는곳에 서있던 여사제 이페투와 거벨룽이 이상한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아무래도 나를 찾는 모양이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한다.

“어떻게 그곳에 계십니까?”

“하하, 글쎄…….”

이페투의 물음에 나는 말꼬리를 흐렸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다행히 이페투는 더 이상 그 점을 물고 늘어지지 않았다.

4

거벨룽과 함께 마을을 한바퀴 돈 후 도착한곳은 처음 눈을 떴던 촌장의 집 근처였다.

“내가 해야할 의무는 모두 마치었다.”

“고맙습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뿐이다. 네가 욜 숲을 방문한 것이 엘모아 님의 뜻이라면 이 인연이 부디 좋은 결과를 낳길 바랄뿐이다.”

거벨룽은 이렇게 말하며 작은 뺏지 같은 것을 내게 주었다.

“이건 미드 포레스트의 통행증이다. 적어도 우리 도시의 일족들은 너의 통행에 거부감을 갖지 않게될 것이다.”

나는 잠자코 그것을 받아들었다.

퀘스트가 끝이 났다는 메시지가 떠오른게 그때였다. 미드 포레스트 엘프족과 사이가 좋아졌다는 말과 함께 미드 포레스트의 통행증을 아이템으로 획득하게 되었다.

거벨룽과 헤어진 후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욜 숲에 좀 더 머무를까? 아니면 아까 여사제에게 들엇던 델스라는 도시까지 무리해서 갈까?

GM을 부르는 것도 한가지 취할수 있는 방법중 하나였지만, 그건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두기로 했다. 샹그릴라 세계 안에서 세계 밖의 존재에게 도움을 청한다는게 조금 내키지 않아서였다. 게다가 형이 만든 세계를 부정하는 것 같은 기분도 약간이나마 들었다.

말마따나 엘모아 여신의 뜻이다.

어디 나무같은데 끼어서 옴싹달싹 못하게 된것도 아니고, 단지 스타팅 포인트가 남다를 뿐이다. 오히려 이런것이야 말로 재미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델스라는 도시로 가는것도 일단 나중에 하기로 했다. 일찌감치 이런 고레벨 존에 온 행운을 간단히 발로 차버리고 싶지 않았다.

잠이야 신전에서 자고, 거기서 먹을 것을 얻어오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여신의 신전으로 향했다. 하지만 막 미드포레스트 마을의 경계밖으로 발을 내미는 순간 생각을 고쳐먹어야 했다.

망할 덴드로이드 클랜이 거기에 떡 버티고 서있었으니까.

다시 마을로 돌아와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나가보았다. 다행히 그곳은 덴드로이드 클랜의 영토는 아닌 모양이었다.

“뭐야, 먹고 자고하는것부터 문제네…….”

공복도 수치가 벌써 반이나 닳아있다.

미드 포레스트를 벗어나 주변을 탐색해 보았다. 누가 엘프 아니랄까봐 풍수 좋은데에도 마을을 차려놓았다. 산열매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수풀을 헤집고 산딸기 처럼 생긴 빨간 열매를 따 모으기 시작했다. 입에 넣어보니 달코름한 맛이 느껴진다. 눈꼽만치나마 배가 차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산딸기를 따던 나는 어느순간 등골이 싸늘해지는 기분을 맛보았다.

뭔가가 나를 주시하고 있다.

절대 호의적이지 않은 그 눈빛에 나는 천천히 몸을 돌려 시선이 느껴지는 방향을 보았다.

늑대…….

롬로스 근교에서 신물나게 잡았던 그거다. 하지만 결코 같은 몬스터는 아니었다. 발톱이 두배길이에 덩치도 훨씬 크다.

전의 것이 시베리안 허스키 만하다면 얘는 황소만했다.

죽는다.

쫙, 소름이 돋고 나는 산딸기를 내던지며 마을쪽으로 도망쳤다. 다른 온라인게임과 같다면 분명 가드가 달려나와 구해줄 것이다.

커엉― 울며 늑대가 내 뒤를 쫓는다.

“사람살려!”

내 외침이 숲안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산딸기를 쫓느라 꽤 멀리 떨어진 모양이다. 아무리 뛰어도 미드포레스트의 경계가 나오지를 않는다.

점점 늑대가 가까워져왔다.

꽤 떨어져있던 발자국 소리가 귓전을 울렸다. 내뿜는 콧김까지 등에 닿는듯한 기분이었다.

아아 죽는건가?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었다. 힘차게 앞으로 다리를 뻗었다. 그런데…….

“어, 어?”

몸이 앞으로 쏜살같이 날아간다. 무협지에서 빠지면 섭한 경공인지 뭔지를 현실에서 쓰면 아마 이런 기분이 아닐까?

갑작스레 더해진 가속도에 종아리뼈가 찌르르 울렸다. 체력까지 조금 깎여나간 기분이들었다.

하지만 속도는 줄지 않았다. 다시 한걸음, 또 한걸음을 내딛자 늑대와 거리를 제법 벌릴수 있었다.

늑대보다 빠른 사나이, 라는 타이틀이 머리에 떠오를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늑대가 점점 멀어져간다.

“뭐, 뭐지? 산건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시야 한가득 갈색 덩어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다.

퍼어억―

별이 번쩍하고, 나는 그대로 벌렁 뒤로 넘어갔다.

시야 주변에 붉은 빛이 아른거렸다. 피 부족 경고다. 나무에 꼴아밖아 빈사상태에 빠지다니.

그때, 뒤쪽 먼곳에서 캐캥― 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나무에서 뛰어내린 미드 포레스트의 경비병들에 늑대가 쫓겨가며 내지른 소리다.

무지하게 쪽팔린 이 상황을 피하기 위해 나는 경비병들을 무시하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에 힘아리가 없다. 능력치 창을 열어보니 체력이 5정도 남아있다. 이거 잘못해서 나무뿌리 걸려 넘어져도 사원으로 실려가는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기척 없는 곳으로 간 나는 일단 나무둥치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상황부터 파악해야했다. 갑자기 왜 달리기가 빨라진건가? 채팅창을 열어 전투로그를 살펴보았다.

가장 아랫줄엔 이런 글이 쓰여있었다.

―한큐 님이 ‘오동나무’로부터 90 데미지를 입었습니다.

빈사상태에 빠졌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반으로 줄어듭니다.

이상혁 작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