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천 이계정복기] 13화

2019-03-18 10:46
달천 이계정복기 표지
달천 이계정복기 표지
[데일리게임]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플래너가 본신으로 싸움에 임했는데 어찌 상대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아스마엘은 플래너가 왜 당연한 말을 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네. 그의 진정한 실력은 바로 검술에 있었다네.”

“네에? 어, 어찌 그럴 수가?”

“난 그가 검을 꺼내 든 모습은 한참을 같이 지낸 후에야 볼 수 있었는데,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믿기지가 않는다네.”

플래너는 회상하듯 눈을 감았다.

그날도 둘은 ‘달튼 매너형 인간 만들기’ 프로젝트를 완성하기 위해서 열심이었다.

“아니, 이 사람!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네그려. 그 동작은 거기서 턴을 한 번 해야 한다고 몇 번을 이야기하지 않았는가.”

성질이 난 듯 소리치는 플래너.

이날은 마침 달천이 댄스 교습을 받던 날이었다. 머리털 나고 예를 중시하는 중원에서 살아왔던 그에게 웬 댄스? 어처구니없어서 대들던 그에게 플래너는 딱 한마디 했었다.

“이 세계에서 아가씨들을 꼬이려면 춤이 첫 번째이네. 배우기 싫으면 관두게.”

이 소리를 듣고 시작한 지 벌써 한 달째. 아직도 기본 스텝에서 헤매는 달천에게 플래너는 가혹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아, 이런. 뭐가 이리 어려워. 어째 이놈의 것은 검술 배울 때보다도 더 힘드냐. 쳇.”

“검……술이라니? 자네, 검도 다룰 줄 아는가?”

“얼라리? 자네, 내 주 무공이 검술인지도 몰랐나?”

플래너는 말문이 막혔다. 자신을 그렇게 쥐어 패던 그 실력 외에 주무공이 따로 있다니. 이 인간이 이제 자기를 겁주려고 공갈까지 친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었다.

“어허, 이 사람. 거짓말도 그럴싸하게 해야 믿지. 자네, 그렇게 안 봤는데 거짓말도 잘하네그려.”

“거짓말? 아니, 이 드래곤이 사람을 어떻게 보고. 당장 나와. 내 보여줄 테니.”

“……!”

“플래너 님…… 플래너 님!”

아스마엘의 부름에 퍼뜩 현실로 돌아온 플래너.

“아스마엘, 길게 이야기할 것 없이 한 가지만 말하지. 그 인간이 검을 꺼내 들면 무조건 도망가는 게 상책이네. 그 무지막지한 검을 보고 그 자리에 있다는 건 그냥 목숨을 포기하는 것과 같다네.”

몸서리까지 치며 말하는 플래너를 보면서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 아스마엘이었다.

“그나저나 자넨 이제 가보게. 다시 한 번 당부하지만 그 인간한테 들키지 않게 조심하게. 그리고 마족에 관한 건은 좀 더 자세히 알아보고 다시 보고하게.”

플래너의 지시가 끝나자 다시 사라져가는 아스마엘이었다. 그가 사라지자 플래너는 다시 뒹굴기 자세로 바꾸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흠, 마족이라…… 그 인간하고 마족하고 마주치면 딱 그림 나오겠

는걸. 흐흐흐.’

사실 심각한 문제인데도 그저 즐기는 플래너였다.

2

바알산은 칼슨 산맥에 산재해 있던 산들과는 그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칼슨 산맥에 있는 산들이 숲이 무성하고 가파른 것에 비해 바알산은 중원의 소나무류 같은 침엽수들이 듬성듬성 곧게 뻗어 있었고 대체적으로 경사가 완만했다. 간간이 불어오는 늦봄의 밤바람은 본래가 청춘 남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그 무엇이 있다.

특히 주변에 꼿꼿이 서 있는 나무들 사이에서 드러난 고고해 보이는 바위에 앉아 부드러운 바람을 맞게 되면 설혹 옆에 평소 경원시 했던 이성이 있더라도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달천은 평생 이렇게 아름다운 밤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귓가를 간질이는 밤바람과 은은히 퍼져 나가는 아이미의 향기가 벌써부터 그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있었다.

옆에서 바라보는 아이미는 말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었다. 가루가 떨어질 것 같은 새하얀 피부, 그린 듯한 아미, 그녀의 자존심을 한껏 높여주는 도도한 콧날, 촉촉하게 젖어 보이는 입술…… 그리고 동그랗게 치켜뜬 귀여운 눈…… 그 안에서 반짝이고 있는 에메랄드빛 눈동자까지…….

그녀가 비록 자신과 다른 종족라 해도 그는 그녀를 자신의 품에 꼭 안고 놓아주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를 불태웠다.

“아이미 양…….”

한껏 목소리에 무게를 잔뜩 싣고 밤의 음흉함을 도움삼아 그로서는 최대한 로맨틱하게 그녀를 살며시 불러보았다.

순간,

“삼촌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

“곰곰이 생각해보니 달튼 씨는 마치 어머님이 예전에 말씀해주셨던 삼촌 같아요. 유쾌하고, 개구쟁이 같고 그러면서도 포근하고………….”

팍! 팍! 팍!(달천 가슴에 꽂히는 비수소리)

‘자기도 아니고 오빠도 아니고 삼촌이래!’

“예전에 외삼촌이 계셨는데 저희 종족들이 네크로맨서들과의 전쟁 할 때 돌아가셨대요.”

이때 달천은 거품을 물고 쓰러져서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당시 네크로맨서들은 저희 종족들을 제물로 쓰려고 마을에 난입했는데 제가 넘어져서 도망도 못 가고 잡히는 바람에 삼촌이 목숨을 걸고 절 구하시고는 대신 잡혀가셨다는…… 흐흐흑.”

“아, 아이미 양, 울지 말아요.”

달천은 입가에 남아 있는 게거품을 스윽 닦고 이번엔 어쩔 줄 몰라서 안절부절못했다. 그가 여자가 훌쩍거리는 것을 언제 겪어보기나 했겠는가.

“그 무렵에 마침 플래너 님이 그곳을 지나치지 않으셨다면 저희 마을은 사라졌을지도 모른대요.”

의연한 미소를 띠며 아이미는 말했다.

“그때 이후로 전 삼촌이 절 보고 보냈던 마지막 미소를 잊을 수가 없었어요. 달튼 씨를 처음 만났을 때 문득 삼촌의 미소가 겹쳤던 것은 우연이 아닌 듯해요.”

“후우, 앞으론 내가 아이미를 지켜줄 테니 울지 마라.”

그냥 지켜주면 지켜주는 거지 한숨은 왜 쉬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삼촌은 너무했다. 대신 오빠라 불러, 앞으로는…… 키잉.”

“아하! 그러면 되겠네요. 오빠…… 오빠…… 오빠.”

그의 품에 폴싹 안겨서 오빠를 되뇌는 그녀의 눈엔 기쁨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고, 달천의 가슴엔 실연의(?)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두 남녀가 뜬금없이 포옹을 했으니 밤바람과 튀어나온 바위의 전설은 절대적으로 사실임이 밝혀졌다.

나름대로 감격스러운 순간이 지나고 두 사람은 야영 준비를 서둘렀다. 물론 둘만 있었기 때문에 야영 준비는 순조로웠다. 둘 다 정령들을 불러낼 수 있으니 그런 일은 식은 죽 먹기라 할 수 있었다.

맛있는 식사까지 끝내고 나서 아이미가 차를 끓이고 있던 그때.

“그 정도 구경했으면 슬슬 기어 나오시지 그래요?”

어디를 보고 그러는 것인지 갑자기 달튼이 허공을 향해 말했다.

“좋게 말할 때 나오시는 게 신상에 이롭습니다.”

“아하하하, 어떻게 아셨습니까?”

숲 한곳에서 갑자기 누군가 어색한 웃음을 던지며 나왔다. 검은 올백 머리에 유들유들한 모습은 바로 얼마 전에 플래너의 레어에 있었던 아스마엘 아닌가.

“누구신데 얼마 전부터 날 졸졸 따라다니는 거지요?”

“헉, 방금 제가 실수로 나뭇가지를 밟아서 눈치 챘는지 알았더니 전부터 따라 다녔던 것도 알고 계셨습니까?”

아스마엘은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훨씬 전부터 자신의 존재가 노출되었다는 것을 플래너가 알면 가만히 안 둘 터였기 때문이다.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하시죠?”

분명 예의 바른 말들이지만 왠지 모르게 눈앞의 인간에게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자신을 조여 온다는 것을 느꼈다.

“저, 저기요…… 오, 오빠.”

달천의 옷 끝을 잡는 아이미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아이미는 엘프였기 때문에 지금 눈앞의 사내가 어떤 존재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것이다.

“잠시만요. 호, 혹시 위대하신 드래곤 아니십니까?”

“흐음, 역시 엘프라 날 한눈에 알아보는구나.”

“미천한 엘프의 여식 아이미가 위대하신 분께 인사드립니다.”

“인사는 나중에 하도록 하자.”

갑자기 자신이 위대한 종족인 드래곤임을 상기한 아스마엘은 위축되었던 마음이 그만 풀려버리고 말았다.

“사실은 달튼 씨, 전 플래너 님의 명령에 따라서 편하게 쉬지도 못하고 모두들 잠이 깨기 전 동트는 아침부터 피로에 몸을 눕히는 한밤중까지 달튼 씨가 행여 위험하지는 않을까, 행여 길을 잃고 방황하지는 않을까 말 그대로 밤낮으로 노심초사하며…….”

“그러니까 한마디로 플래너가 보낸 첩자다, 이 말이네?”

아스마엘의 긴 사설을 듣다못해 말을 자르고 묻는 달천이었다.

“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전 다만 플래너 님께서 달튼 씨가 이 세계에는 처음이시라 낯선 데다가 아직 잘 모르는 부분도 많으니 혹시라도 무슨 사고라도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우셔서 저에게 한시도 달튼 씨에게서 눈을 떼지 말라는…….”

“아따, 그러니까 날 감시했던 거구만.”

대체 언제 끝날지 모를 장황한 설명에 슬슬 피가 머리로 몰리는 달천이었다. 하긴 인내심으로 알아주는 플래너마저 성질이 나 쥐어 팰 정도이니 달천이 참기를 바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 만했다.

“아니, 감시한 게 아니고요. 오로지 달튼 씨를 위한 플래너 님의 고결한 마음씨를 담아 저를 달튼 씨 보좌 비슷한 그…… 뭐랄까…….”

아이미는 대체 이 상황을 어찌 판단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 생각에 아무리 달천이 뛰어나고 대단한 힘을 지녔다 할지라도 그녀 상식엔 그가 플래너 님을 막 부르는 것도 그렇고 드래곤인데도 그 소리에 아무런 거부 반응 없이 듣고 있는 아스마엘도 그렇고,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뿐만 아니라 플래너 정도는 아니라 해도 드래곤이란 존재가 어찌 한낱 인간 앞에서 저리도 쩔쩔맬 수가 있을까?

“당신 이름이 뭐요?”

슬슬 혀가 짧아지는 달천이었다.

“아, 제가 깜박하고 제 소개를 안 했군요. 전 드래곤 중에서도 냉철한 이성과 지혜로 유명한 블랙 드래곤 아스마엘이라고 합니다.”

“좋소, 아스마엘. 여긴 숙녀분도 있고 하니 우리끼리 잠시 자리를 저쪽으로 자리를 옮겨서 대화합시다.”

조금은 음침해 보이는 숲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면서 달천은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요. 역시 대화는 수컷(?)끼리 해야 진지해지는 법이죠. 예전에 제가 글쎄 암컷 사이에 끼어서 말을 했다가…….”

그 잠깐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쉬지 않고 나불대는 아스마엘. 밤은 점점 깊어가고 숲은 그와 더불어 침묵이 깊어만 가는데…….

“쿠워워웡! 멋쟁이 드래곤 살류.”

“시끄러워. 조용히 안 하면 두 배로 맞는다.”

퍼억! 퍼억!

우당탕!

빠지지직!

“끄워…… 어르르 르륵.”(참고: 드래곤이 아픔을 참는 소리) 밤새도록 쉬지 않고 들리던 이날의 엄청난 소음은 조용함과 아늑함을 트레이드마크로 내세웠던 바알산에 커다란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3

라켄 대륙은 크게 동대륙과 서대륙 그리고 북대륙, 이렇게 세 개의 대륙으로 나눌 수 있다. 남쪽으로는 수많은 크고 작은 섬들이 산재해 있는 데다가 그나마 넓게 퍼져 있기 때문에 대륙으로 여기지 않는 게 보통이다.

슬리버 왕국은 세 개의 대륙 중에 서대륙에 위치하고 있다. 북대륙과는 육로로 이어지지만 동대륙과는 하바 해협이 가운데를 길게 가로지르고 있어서 거리에 비해 왕래가 편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항만 시설의 발달과 조선업의 눈부신 성장으로 무역과 문화 교류가 무척 활발해졌다.

카운티 영지가 최근 급부상하는 이유는, 바로 카운티 영지 내에 동대륙과 교류할 수 있는 항만 시설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상업이 발달했고, 그렇게 경제가 성장함에 따라 그것을 지키기 위한 군사력증강 등을 꼽을 수 있다.

홀로선별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