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황금의 어스듐 8화

2019-07-15 11:40
제3장 티노의 공방 생활
제3장 티노의 공방 생활
[데일리게임] 끼어들 틈 없이 이뤄지는 문답에 테이슨은 안절부절못했다. 공방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부심이 강하니 말조심하라고 충고한 것이 얼마 전이건만 무슨 배짱으로 저리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 여기까지 데리고 온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시문은 좀 전보다 더 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결국 갈 곳이 없어서 여기에 왔단 소리군요? 이쪽 일엔 전혀 관심도 없으면서?”

“예! 전 친위대에 들어가는 게 꿈이거든요.”

이 화제에 있어서만큼은 타협이 없는 티노는 거침없이 답했다. 그러는 한편 현실과 타협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가 앞서 말했듯이 먹고 살아야 꿈도 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꾀부릴 생각은 없어요! 시키는 일은 요령 피우는 일 없이 열심히 할 겁니다!”

“흐음.”

매끄러운 턱을 어루만지며 고민하던 시문이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좋아요. 어차피 일손이 부족하니까. 지금부터 고용하는 걸로 하죠. 급료는 일하는 거 봐서 결정하겠습니다. 대신 숙식은 제공하죠.”

“예! 잘 부탁드립니다!”

공방에 첫 발을 내딛은 수습 기술자의 대우가 어떤지 몸으로 겪어 봐서 잘 아는 티노는 흔쾌히 고개를 끄떡였다. 대부분의 공방은 국가에 소속되어 있기에 공방 주인이 아주 악질이 아닌 한 급료로 장난치는 일은 드물었다. 거기다 친위대원인 테이슨이 중개인이 되어 줬으니 한결 안심할 수 있었다.

“들어와요.”

시문은 티노를 보며 말한 뒤 테이슨을 돌아봤다. 그러자 테이슨은 아쉽다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전 예정보다 시간이 늦어져서 어서 돌아가 봐야 합니다.”

그리곤 티노를 내려다보았다.

“잘 하고 있으렴. 조만간 다시 오마.”

티노에 대해 계속 신경 써 주겠다는 뜻이었다. 어지간히 사람이 좋구나, 티노는 감탄하며 활짝 웃었다.

“그럼 수고하십시오.”

공방에 들어오자마자 그리 말한 시문은 금방 사라졌다. 숙소를 안내해 주거나 할 일을 알려 주는 등의 자잘한 일까지는 기대도 안 했지만 공방의 다른 직원들에게 소개는 시켜 줘야 하지 않나? 황당해하는 티노 옆에서 라디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시문을 말없이 배웅하고 있었다. 그러다 시문이 공방 구석의 커다란 철문 너머로 사라지고 나자 명랑하게 말을 걸어 왔다.

“난 라디야! 우리 공방에 온 걸 환영해!”

“난 티노. 잘 부탁…….”

또래라 별 생각 없이 인사했다가 공방 선배라는 걸 떠올리고 멈칫했다. 공방 안에선 실력이 곧 힘이지만 고만고만한 사람들에겐 소위 말하는 짬밥이 힘이다. 티노는 워낙 어렸을 때부터 공방 생활을 했기에 또래 아이들은 무조건 티노의 후배였다. 그래서 현재 상황이 좀 어색하긴 했지만 곧 떨쳐 내고 일부러 친한 척 물었다.

“아, 선배님이라고 해야지요? 죄송합니다.”

“후후! 편하게 해. 나도 들어온 지 세 달밖에 안 된걸?”

그리곤 티노의 무기들을 부럽게 바라보며 말했다.

“게다가 난 올해 기초 군사 훈련을 마쳤어. 올해 성인이 된 건 똑같으니까 우리 그냥 친구하자. 여긴 내 또래가 없어서 심심했거든.”

“그럼 나야 좋지!”

친구로 지낸다 해도 라디가 티노의 직속선배라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그녀가 친근하게 대해 주면 티노로서는 대환영이다.

“근데 넌 몇 살이야?”

“열여섯. 넌?”

“열여덟. 성인이 되는 데 3년이나 걸렸어. 넌 1년 만에 통과한 거네? 대단하다!”

생각했던 것보다는 많았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 때문에 더욱 어려 보였던 것이다. 라디는 내내 티노의 총에서 시선을 못 뗐다. 마을 아이들에게서 종종 보았던 눈빛이라 티노는 피식 웃으며 물었다.

“무기가 없나 봐?”

“응.”

“성인이 됐으니 하나 정돈 구입하지 그래? 돈이 없어?”

“그렇지 않아도 사려고 했는데……. 선배님들이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참아 달래.”

“……용케 통과했구나.”

“그래도 사격은 좀 해.”

라디는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다 금세 명랑해져서는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따라와! 공방 안내해 줄게! 숙소랑 식당도!”

“응! 근데 밥은 언제 먹어?”

일부러 그런 것처럼 티노의 뱃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크게 울렸다. 라디는 까르륵 웃으며 걷던 방향을 틀었다.

해가 뜨자마자 자연히 눈이 떠졌다. 아직 낯설게 느껴지는 천장을 보며 기지개를 편 뒤 일어났다. 배정받은 방은 침대와 낡은 책상과 의자, 붙박이장만 있는 작은 방이었다. 그래도 혼자 쓰는 것이라 좋았다. 화장실과 욕실은 공동이었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집에서 출퇴근을 해서 언제나 한산했다. 간단히 씻고 도로 방으로 와서 옷을 입었다.

고향에서는 항상 허리에 차고 다니던 벨트 주머니를 생략하고 대신 작은 주머니가 많이 달린 조끼와 바지를 입어 필수적인 공구를 비롯한 여러 가지 잡다한 물건을 넣었다. 항상 가지고 다녔던 덕에 공구들이 없으면 손가락 몇 개가 없는 것처럼 어색하고 허전했다. 백팩을 비롯한 무기는 붙박이장에 넣어 두고 자물쇠를 채웠다.

이곳 공방은 램의 공방보다도 넓었다. 매일 소모되는 어스듐만큼 쌓이는 원석을 보관하는 용으로도 쓰이기 때문이다. 원석으로 만든 그릇이나 가로등 등은 의도적으로 강한 힘을 가하지 않는 한 쉽게 깨지지 않고 반영구적으로 쓰이기에 원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한다. 전쟁이 벌어지면서 한시적으로 늘었다가 다시 한가해졌는데, 그래도 전쟁 전보다는 일이 늘어난 편이란다.

오늘도 티노가 제일 처음 공방 문을 열었다. 창문까지 전부 연 뒤에 청소함에서 걸레를 꺼내 청소를 시작했다. 빗질은 어제 공방 운영이 끝난 뒤 해 뒀다. 원래 공방 청소는 신참의 몫인 법이다. 섬세한 기계는 기술자들이 청소해야 하지만 램의 공방에서 기계 청소를 곧잘 맡았던 티노는 죄다 닦고 정돈해 버렸다. 처음엔 기함하던 직원들도 청소 상태를 보고는 하루 만에 모두 티노에게 떠넘겼다. 이곳은 램의 공방과는 비교할 수 없게 기강이 해이했다.

“안녕, 티노! 오늘도 제일 일찍 왔네?”

“안녕.”

티노보다 조금 늦게 온 라디는 바로 걸레를 꺼내 들고 티노가 아직 손대지 않은 쪽으로 가서 일을 시작했다.

“넌 정말 아침잠이 없는 것 같아. 난 매일 일어날 때마다 나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데.”

“몸에 배서 그래. 할아버지 밑에서 무사히 살아남으려면 부지런해야 되거든. 며칠 밤샘하고도 기운이 펄펄하신 분이라.”

“그래도 너 없으니 지금쯤 기운 없어 하고 계실 거야. 수도에 혼자 보내고 얼마나 쓸쓸하시겠어?”

“절대 그럴 분이 아니야.”

티노는 진실을 말했지만 라디는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연히 티노가 할아버지 밑에서 컸다는 걸 알게 된 라디는 그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다.

라디가 가세하자 청소는 금방 끝났다.

“자! 이제 밥 먹으러 가자!”

공방의 식당은 낮에만 고용된 요리사가 와서 만들고 간다. 즉, 아침과 저녁은 공방에서 숙식하는 직원이 알아서 해 먹어야 한다. 램에 비하면 수준급의 요리 실력을 가진 티노지만 라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같은 고기를 줬을 때 램이 숯을 만들고 티노가 구이를 만든다면 라디는 찜, 구이, 완자, 볶음요리 등 온갖 것들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티노는 옆에서 보조하거나 설거지만 했다.

졸인 사과와 토마토, 고기 등을 넣어 만든 스튜를 순식간에 만들어 낸 라디는 호밀빵과 복숭아절임을 곁들여 아침을 차렸다. 거기에 정성껏 우린 차까지 합해서 보기 좋게 쟁반에 담았다. 그것은 공방의 지하 작업실에 틀어박혀 사는 공방 주인, 시문의 것이었다.

라디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식당을 나섰다.

“갔다 올게!”

“응, 난 정리하고 있을게.”

라디가 배달하고 오는 동안 티노는 그들이 먹을 상을 차렸다. 처음에는 뭣도 모르고 신참인 자신이 그 일을 대신하려다 눈 밖에 날 뻔했다. 라디는 아침 배달을 하루의 즐거운 시작으로, 점심 배달을 즐거운 휴식으로, 저녁 배달을 즐거운 마무리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식사는 지하 작업실 문 옆의 벨을 누르면 시문이 나와서 받는다. 그리고 감사의 인사를 하곤 내려가는데, 그 짧은 대화가 라디에겐 그렇게 황홀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역시나 이번에도 몽롱한 얼굴로 되돌아온 라디를 보며 티노는 내심 혀를 찼다.

원래는 식당과 연결된 기둥 안의 통로를 통해서 식사가 배달되던 것이 라디가 온 이후론 저런 식으로 변했단다. 안 그럼 시문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알 수가 없다고 강하게 주장했다는데, 다른 직원들도 만장일치로 동의했다는 것이 조금 우습다.

식탁에 앉아서 스튜를 한 술 뜨려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여어, 후배들! 오늘도 부지런하군! 바람직한 일이야. 암암!”

씻지도 않은 지저분한 몰골로 히죽이며 들어온 남자는 티노를 포함해서 셋밖에 없는 수습 기술자 중 한 명으로, 이름은 웨이다. 청소에 요리까지 다 끝난 다음에야 숟가락 하나 얹어보겠다고 나타난 그가 못마땅했던 티노와 라디는 대답 않고 식사를 계속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웨이는 제 그릇에다 스튜를 가득 퍼서는 호밀빵을 한 손에 쥐고 라디 옆에 앉았다. 그는 티노를 촌뜨기라고 무시하면서도 기초 군사 훈련을 1년 만에 마쳤다는 것을 의식하여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오! 역시 라디야! 맛이 환상적인걸?”

호들갑을 떨며 스튜를 퍼먹는 모습은 넉살 좋게 느껴지기보단 얄밉게 여겨졌다. 왜냐면 항상 그걸로 끝내지 않고 안 좋은 뒷말을 붙이기 때문이다.

“근데 조금 달군. 역시 어려서 단 게 좋은 건가? 시문 님은 단 것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말에 라디가 움찔했다. ‘시문’이 걸리면 예민해지는 그녀의 반응을 웨이는 노골적으로 즐겼다.

“저녁은 든든하게 스테이크 어때?”

“드시고 싶은 웨이 선배가 만들면 되겠네요.”

“내가 만들면 시문 님이 실망하실 거야. 시문 님은 라디 요리를 좋아하잖아?”

웨이가 얄미워서 저녁은 건너뛰고 싶어도 시문을 잠깐이나마 만나는 즐거움을 포기하기는 힘들었던 라디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분해서 얼굴을 붉히는 그녀를 보며 웨이는 낄낄 웃었다.

“또 쓸데없이 라디 놀리는 거냐, 웨이?”

“어? 힐 선배님?”

웨이는 물론 티노와 라디도 문 쪽을 돌아봤다. 푸짐한 몸집의 힐이 한 손을 슬쩍 흔들며 들어오고 있었다. 티노와 라디가 일어나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웬일이세요, 이렇게 일찍?”

“하하! 그게 말이다…….”

힐은 말을 흐리며 식탁에 차려진 음식을 보고 군침을 삼켰다.

“음식 남은 거 있냐?”

“예, 앉으세요.”

“아니, 아니다. 내가 갖다 먹으마. 먹던 거 마저 먹어라.”

신참인 티노가 일어나자 힐이 손을 내저으며 말렸다. 그리곤 직접 부엌으로 들어가 그릇을 찾았다.

“아침 못 드셨나 봐요?”

“또 씨드가 끊겼지 뭐냐! 이달 들어 벌써 두 번째다! 오븐이며 뭐며 죄다 작동 안 하는데 뭘 해 먹을 수가 있어야지! 마누라는 잘 됐다고 더 잔다며 나가서 먹으라고 하질 않나!”

“또요?”

도시에는 대형 어스듐의 에너지, 즉 씨드를 어스듐 라인을 통해서 생활용품과 가로등 등에 공급하는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다. 어스듐의 보충이 미흡하면 외각부터 씨드가 끊겨 가로등 등이 꺼지는 경우가 가끔 있긴 하지만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때문에 티노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씨드가 자주 끊겨요?”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엑서디움 전쟁 이후로 이 모양이다.”

“근래 들어선 특히 잦아진 거 같아요.”

라디가 맞장구쳤다. 힐은 투덜거리며 티노의 옆에 와 앉았다. 그의 양손엔 각기 스튜와 빵이 들려 있었다. 그는 빵을 쭉쭉 찢어 스튜에 찍어 먹으며 계속 투덜거렸다.

“전쟁 때 어스듐 라인 어딘가가 잘못된 게 분명해. 제길! 쓸모없는 왕성 유지에는 온갖 예산을 퍼부으면서 시민들 안위는 신경도 안 쓰지! 무능력한 정부 같으니!”

“뭐, 어쩌겠어요. 정 불만이면 공방처럼 비상용 어스듐과 라인을 구비해 놓는 수밖에요.”

“그게 한두 푼 드냐?!”

공방에서 생활하는 덕에 씨드가 끊길 걱정을 할 필요가 없는 웨이가 약을 올렸다. 힐은 인상을 구기며 스튜를 그릇째 들이마셨다.

수습 기술자가 아침에 가장 먼저 하는 정식 업무는 ‘원석 세척’이다. 어스듐 교환소에서는 코어를 뽑아내기 전에 어스듐을 정제하기 때문에 원석이 깨끗하지만 다른 곳에서 오는 원석은 불순물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불순물이 남아 있는 원석을 그대로 가공하면 결이 울퉁불퉁하고, 투명도가 탁하며, 완성품의 색상이 곱게 나오지 않는다. 때문에 모든 가공 작업에 앞서 불순물 제거를 필수적으로 해야만 한다. 어렵지는 않지만 번거롭고 따분한 작업이다.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