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황금의 어스듐 17화

2019-07-15 13:51
아르고-황금의 어스듐 17화
[데일리게임]

“갑자기 원석을 잔뜩 가지고 오셔서는 당장 필요하다고 세척해 달라잖아? 그래서 해 드린 것뿐이야. 덕분에 한숨도 못 잤다고.”

“왜 신참인 너한테 부탁하셨대? 나나 웨이 선배도 있는데…….”

“너나 웨이 선배는 승급시험 때문에 정신이 없다는 걸 아니까 그러셨겠지. 게다가 라디는 여자잖아. 밤을 새워야 할 일을 시키고 싶으셨겠어?”

아마 시문은 필요하다면 남녀노소 안 가리고 똑같은 일을 시켰을 것 같지만 듣기 좋은 소리야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청취자가 아침과 저녁식사를 책임지고 있는 뛰어난 실력을 가진 요리사라면 더더욱!

“하긴……. 시문 님은 다정하신 분이니까!”

두 눈에서 이글거리던 불꽃이 어느새 콩깍지가 잔뜩 씌워진 황홀한 오라로 변하며 라디는 춤추는 듯한 걸음으로 식당 밖을 나갔다.

남겨진 웨이는 티노를 노골적으로 차갑게 무시했으나 티노 역시 유치한 그의 언행을 신경 쓰지 않았다. 여느 때처럼 라디가 만든 요리로 상을 차리기 시작했는데 웨이는 요리할 때와 마찬가지로 손 하나 꿈쩍 안 했다.

웨이의 유치한 시비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시작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라디와 둘이서 그날 분량의 원석 세척을 하고 점심을 먹은 뒤였다. 남은 식사시간 동안 쉬다가 부지런히 원석 수거를 하고 온 티노는 세척실 구석의 서랍장에 넣어 둔 책을 꺼내 들었다. 테이슨이 가져다 준 교재 중 하나였다. 그리고 햇볕 좋은 밖으로 나가려는데 웨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근무시간에 왜 자꾸 딴 짓이야?”

“……?”

참고로 웨이는 티노가 잠도 못 잔 상태로 청소하고, 요리 돕고, 원석 세척하고, 원석 수거해 오는 동안 여태 그래 왔던 것처럼 승급시험 준비랍시고 원석을 말아먹고 있었다.

“그렇게 공부가 하고 싶으면 다 때려치우고 공부나 하라고. 아니면 근무시간 외에 하든가!”

“웨, 웨이 선배, 왜 그러세요?”

웨이의 기세에 눌린 라디가 평소의 쾌활함을 잃고 조심스럽게 말리려 했지만 그럴수록 웨이의 목소리는 더욱 커졌다.

“근무시간엔 네 직무에나 충실하란 말이다!”

웨이가 얼마나 직무에 충실하지 않은지 아는 라디와 티노는 기막히다는 얼굴로 그를 보았다. 찢어진 입이라고 말은 참 잘한다. 같은 수습 기술자면서 청소는커녕 자기 식사도 라디와 티노에게 떠넘기는 주제에 저런 말하기 부끄럽지도 않은가?

티노는 결국 한숨을 푹 쉬고 대답했다.

“전 승급시험을 준비할 필요가 없어서요.”

“시답지 않게 친위대에 들어가겠다며 헛꿈을 꾸고 있지만 결국 넌 원석 가공 공방의 수습 기술자야! 그에 걸맞게 행동해야지!”

“그래서 일하잖아요.”

뭘 더 어쩌라고?

“일한다는 놈이 근무시간에 책이나 봐?”

“수습 기술자가 하는 일이 승급시험 준비 외에 더 있는 줄 몰랐네요. 뭘 더 하면 될까요?”

티노의 어조는 지극히 공손하고 정중했다. 그러나 자격지심이 머리끝까지 차오른 웨이는 그것을 비꼬는 것이라 받아들이고 얼굴을 시뻘겋게 붉혔다. 승급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다는 것은 그에게도 상당한 상처였던 것이다.

……참고로 티노가 공손한 척 비꼰 게 사실이긴 했다.

“너……!”

“무슨 일이야? 왜 이리 시끄러워?”

문이 벌컥 열리며 작업복 차림의 기술자 선배가 들어왔다. 언성이 커지다 보니 밖에까지 들린 모양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웨이는 억지로 쥐어짜는 웃음을 간신히 지어 보인 뒤 씩씩대며 나가 버렸다. 소란의 진상이 드러나면 자신만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던 것이다. 미심쩍은 얼굴로 티노와 라디를 보는 선배에게 티노도 싱긋 웃으며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에요. 웨이 선배가 시험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모양이에요.”

“그래? 하긴…….”

승급시험 중 가장 쉬운 첫 번째 시험에서 두 번이나 떨어졌으면 그럴 만도 하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으나 딱 그런 얼굴로 기술자 선배는 손을 휘휘 저어 보였다.

“너희가 이해해 줘라. 녀석, 실력이 없는 건 아닌데…….”

“이해하고말고요. 저희는 걱정 마세요.”

티노가 넉살 좋게 대답하자 선배는 대견하다는 얼굴로 끄떡이곤 나갔다.

탁, 하고 문이 닫히는 순간 라디는 맥이 빠진 듯 주저앉았다. 하아, 하고 깊이 한숨을 쉬며 어깨를 축 늘어뜨리곤 물었다.

“웨이 선배, 왜 저래?”

“시문 님이 웨이 선배가 승급시험 준비 때문에 아무 일도 안 한다는 걸 알고 계신 모양이더라고.”

티노는 라디의 어깨가 움찔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 그래?”

“내가 말했다고 생각하나 봐.”

“저, 저런……. 티노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라디는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입가가 경련할 것처럼 억지웃음을 지었다. 알기 쉬운 그 반응에 티노는 웃음을 삼켰다. 역시 라디였구나!

“덕분에 자꾸 시비를 걸어서 못 살겠다고. 휴우…….”

일부러 한숨을 푹 쉬며 말하자 라디는 안절부절못하며 시선을 이리 던졌다 저리 던졌다 했다.

“히, 힘들겠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뭐 그냥저냥 버틸 만해. 저러다 말겠지.”

사실 웨이의 언행에 대해선 조금도 신경 쓰고 있지 않지만 진짜 원인 제공자 앞에서 약한 척 정도는 해 줘야 한다는 상식은 있었다.

“그래…….”

라디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기운 내라는 의미로 뭐 맛있는 거 해 줄까?”

“나야 좋지!”

이상하게도 고맙다는 생각은 전혀 안 들지만, 어쨌거나 시문의 은밀한 강요…… 아니, 지원 덕에 코어가 그럭저럭 순조롭게 모였다.

이제 필요한 건 안전한 판매로다. 예전에야 램의 공방에 드나드는 사냥꾼들을 많이 알고 있었기에 믿을 수 있는 자에게 몰래 팔 수 있었지만……. 어떻게 해야 비밀을 유지하면서 적당한 가격에 팔 수 있을까?

테이슨에게 부탁하기는 그렇다. 맡은 일이 있음에도 틈틈이 부업을 하고 있었다는 걸 들키면 모양 빠지니까. 거기다 분명 코어가 나온 출처를 알고 싶어 할 텐데, 원석에서 코어를 짜냈다는 걸 솔직히 말하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게 뻔하다. 티노는 자신의 코어 제작 능력이 수준급이라는 걸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시문에게 부탁해 볼까도 생각했지만 수상하기 짝이 없는 그에게 어떤 것이든 빌미 잡힐 구석을 만들어 놓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충분히 빌미 잡혀 있는 상태긴 하지만 말이다. 당장은 급할 것 없지만…….

“티노, 아까부터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응?”

티노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 라디를 돌아봤다. 양심의 가책을 옴팡 느끼며 한참 전부터 부엌에 틀어박혀 있더니만 드디어 완성한 모양이다.

“짜잔!”

라디는 자신만만하게 자신의 손에 들린 쟁반을 쭉 내밀어 보였다. 그 위에는 달콤새콤한 냄새가 가득 풍기는 산딸기 파이가 있었다.

“와! 맛있겠다!”

뒤늦게 군침을 삼키며 감탄하자 라디는 득의양양한 얼굴로 가슴을 쭉 내밀었다.

“먼저 시문 님께 드리고 올 테니까 먹을 준비하고 있어.”

“응!”

티노는 냉큼 일어나서 부엌으로 달려갔다. 조리대 위에 아까 본 것보다 커다란 산딸기 파이가 김을 모락모락 피어올리고 있었다. 선명하게 붉은 색상이 탐스럽기 그지없었다.

작은 접시와 컵, 파이를 자를 칼, 포크 등을 챙겨서 우선 식탁 위에 갖다 놓고 차가운 우유도 꺼내 놨다. 마지막으로 대망의 산딸기 파이를 조심스럽게 가지고 갔다.

그러는 동안 라디가 돌아왔다. 언제나 그랬듯이 두 볼을 붉힌 채 황홀경에 빠진 몰골로.

‘라디한테는 공방 조사에 대한 건 반드시 비밀로 해야겠군.’

만약 들키면 시문이나 (있는지는 확실히 모르지만)시문의 일당한테 당하기 전에 라디 손에 죽어날 거란 확신이 든다.

“아니! 이게 무슨 냄새야?!”

……왜 안 오나 했다.

“오늘 무슨 날이야? 시문 님 생신은 아닌데? 흐흐, 덕분에 입이 호강하게 생겼군!”

아까 그 난리를 쳐 놓고도 낯짝 두껍게 웃으며 다가오는 웨이를 라디는 조금 껄끄럽게 바라보았다. 마음 같아선 당신 몫은 없다고 쫓아내고 싶은데 시문에게 고자질한 것이 자신이라서 걸리는 듯했다.

웨이는 연신 싱글벙글 웃으며 입맛을 다셨다. 하지만 역시나 티노를 볼 때는 가시가 박혀 있었다.

“신참! 너 꽤 강하다며?”

“아직 멀었지요.”

그 말은 겸손이 아니었다. 티노의 목표까지 도달하려면 까마득하게 멀고도 멀었으니까. 언제가 될지 감이 안 잡힐 정도로.

티노의 답에 웨이의 눈썹이 위로 꿈틀했다. ‘제가 좀 잘났지요, 핫핫!’ 같은 답을 원한 것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성벽 조명등이 깨졌대. 교체해야 하는데, 네가 갔다 와라.”

“이 시간에 티노보고 가라고요? 그 정도는 웨이 선배가 해야지요! 티노가 성벽 조명등을 갈아 끼워 봤을 리 없잖아요!”

라디가 울컥하며 끼어들었다. 하는 일 없이 빈둥대는 웨이가 얄밉기도 하고, 그가 자꾸 티노에게 심술을 부리는 것에 책임감이 들기도 했다. 차마 시문에게 시시콜콜 고해바친 것이 자신이라고 밝히지 못하는 죄책감도 있고.

“크기만 다를 뿐 집의 조명등하고 같아. 난 여태까지 힐 선배님을 도와 성벽 조명등을 만들다 왔다고. 저놈이 왕실 예법인지 개뼈다귀인지를 공부하는 동안 말이야.”

그리곤 익살스럽게 몸을 움츠리며 엄살을 떨었다.

“게다가 이 몸은 연약해서 몬스터와 탈주병들이 활개 치는 성벽을 밤에 갔다 올 수가 없단 말이야.”

“티노는 뭐 달라요? 얜 이제 16살이라고요!”

“명색이 친위대원이 되겠다는 녀석이 몬스터를 무서워하면 쓰겠어?”

티노를 얕잡아 보는 얼굴로 말은 하는데, 그를 도발하려는 의도가 훤히 보여서 간지럽지도 않았다. 티노에게서 만족할 만한 반응을 보지 못한 웨이는 흥, 하고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 권하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파이를 한 조각 잘라 갔다.

“어쨌든 난 내 할 일을 다 했으니 이제 좀 쉬어야겠어.”

“예, 푹 쉬세요. 제가 갔다 올게요.”

“티노! 밤의 성벽은 정말 위험해!”

라디가 기함을 하며 말렸지만 티노는 대범하게 웃어 넘겼다.

“무장하고 가면 돼. 저렇게 무서우시다는데 강요하면 되겠어?”

웨이의 눈썹이 또 한 번 꿈틀했지만 앞서 자기가 한 말이 있기에 뭐라 반박하지는 못했다.

“우선 이것부터 먹고 가야겠다. 진득하니 앉아서 다 먹으려고 했는데 아깝게 됐네.”

티노는 파이를 큼지막하게 잘라서 자신의 접시로 옮기며 입맛을 다셨다. 그러자 라디가 갑자기 친절한 얼굴로 말했다.

“이건 네 거로 구운 거니까 네 방에 갖다 놓고 먹어.”

그러면서 라디는 웨이 손에 닿지 않도록 파이 접시를 티노 옆으로 끌어다 놨다. 웨이가 버럭 항의하려 했으나 라디가 먼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건 항상 제일 먼저 일어나서 청소를 혼자 거의 다 하고, 나 승급시험 공부하라고 원석 수거를 혼자 해 주는 보답이야.”

“와! 고마워! 라디도 먹어. 이거 진짜 맛있다!”

티노는 사양하지 않았다. 자꾸 생떼를 쓰는 웨이의 약을 올리려는 의도도 물론 있었지만 라디의 산딸기 파이는 정말로 맛있다.

그리하여 23살짜리 연약한 청년을 위해서 16살짜리 용맹한 소년이 나서게 되었다.

* * *

도로의 가로등이나 집과 성벽의 조명등이나 각기 디자인과 크기의 차이만 있을 뿐 재료는 똑같이 원석이다. 원석은 물리적으로 강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때문에 집의 조명등을 바꾸는 일은 거의 없다. 무지막지한 부부싸움이 벌어졌을 때는 예외지만.

그에 반해 가로등이나 성벽의 조명등은 종종 바꿔야 하는 일이 생긴다. 주로 가로등은 사람 때문에, 성벽은 몬스터 때문에 깨지곤 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원석 가공 공방에 의뢰를 하는데 공방의 수가 워낙 적기에 이 역시도 구역을 나눠서 맡고 있다. 빈도수로 따지면 가로등보다 성벽의 조명등이 깨지는 일이 압도적으로 많다.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