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황금의 어스듐 30화

2019-07-15 14:21
아르고-황금의 어스듐 30화
[데일리게임]

철문 안을 들어서자마자 있는 계단을 내려와 도착한 시문의 작업실은 의외로 평범했다. 두 벽면엔 천장까지 닿는 책장이 짜여 있고, 그 책장을 꽉 채우고도 넘쳐 나는 책들이 책장 앞에 티노의 키보다도 높게 몇 겹이나 쌓여 있다. 다른 한쪽 벽의 반은 책장처럼 천장까지 닿는 서랍장이 있고, 나머지 반에는 가로와 세로가 좁고 폭은 깊은 선반이 칸칸이 짜여 있어 그 안에 돌돌 말린 종이들이 빼곡히 박혀 있다. 남은 한쪽 벽에는 두 개의 문이 있는데, 문짝 외의 벽면엔 스케치인지 낙서인지 모를 것이 휘갈겨져 있는 종이들이 몇 겹이고 포개어 붙어져 있다.

작업실의 한가운데에는 넓은 작업대가 몇 개나 붙어 있는데, 그 위엔 빈 공간이 전혀 없다. 한 작업대에는 원석이 산처럼 쌓여 있다 못해 바닥까지 흘러 내려와 있다. 그 위로 공구 따위가 아무렇게나 얹어져 있다. 또 한 작업대에는 책들이 마구잡이로 쌓여 있다. 펼쳐져 있는 책 위에 다른 책들이 쌓여 있기도 하고, 책의 중간 중간에 종이가 끼어져 있기도 하고, 책 속에 메모를 해 놓은 것도 있다. 심지어 낙서를 해 놓은 책도 있다. 다른 작업대에는 스케치용인지 널찍한 판이 비스듬하게 대어져 있다. 그 위에도 여러 장의 종이들이 잔뜩 포개어 놓여 있다. 그 주변엔 온갖 필기도구가 규칙 없이 굴러다니고 있다. 바닥에는 깎여 나간 원석 부스러기와 먼지와 구겨진 종이와 책 따위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작업실 자체는 넓지만 어디 하나 빈 공간이 없었다. 어딘가에 버섯이 피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시문의 작업실은 평범하게 너저분했다. 이래서야 친위대가 수색하러 덮쳤을 때 뭔가를 발견했다면 오히려 그게 신기했을 것 같다. 그래도 환기 시설은 잘되어 있는지 공기는 맑다.

타고난 연구쟁이인 할아버지와 친구를 뒀지만 그들의 작업실은 복잡하긴 해도 깔끔하고 정리정돈이 잘되어 있었다. 그들은 기계를 다루기 때문에 그런 것일까? 조립 따위를 할 때 부품이 어디 있는지 모르면 안 되니까? ……그래도 이건 좀 심하다.

청소부로 고용된 거였나? 티노는 순간 자신이 고용된 이유조차 헷갈렸다. 티노가 구경을 하는 동안 시문은 순식간에 아침을 먹어 치웠다. 라디의 정성이 아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맛이나 제대로 느끼는 건지 모를 지경이다. 시문은 쟁반을 문가에 갖다 놓으며 말했다.

“저쪽의 왼쪽 문이 화장실입니다. 그 안에 욕실로 가는 문이 있어요.”

“오른쪽 문은요?”

“제 침실입니다.”

티노는 고개를 한 번 끄떡인 뒤 작업실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시문이 필요하다 했던 티노의 능력이 발휘될 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어 보였다.

“여기서 뭘 하면 되나요?”

“여기서가 아닙니다.”

시문은 눈가에 호선을 그리며 벽면 쪽으로 걸어갔다.

“친위대의 경계망에 오를 짓을 하면서 설마 대놓고 작업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 건 아니겠지요?”

“그건 아니지만…….”

티노는 어깨를 으쓱였다.

“설마 저를 바로 그 비밀장소로 데려갈 거라 생각하진 못했거든요.”

“어제 말했듯이…….”

시문은 몹시 재미있다는 얼굴로 티노를 슬쩍 돌아보았다.

“램 장인의 손자를 못 믿으면 누굴 믿겠습니까?”

“자, 어서 가지요! 핫핫!”

티노는 꿀릴 것도 없고 죄지은 것도 없고 거리낄 것도 없다. ……단지 들키고 싶지 않은 것뿐이다. 적어도 티노의 꿈을 위해 조금이라도 내세울 만한 무언가를 해내기 전까지는 말이다.

시문이 멈춰 선 것은 서랍장이 빼곡히 들어선 벽면 앞이었다. 그를 따라 서랍장 앞에 선 티노가 물었다.

“이 뒤에 비밀통로가 있는 거예요?”

“예.”

“이 서랍은 위장인가요?”

“겸사겸사죠. 전 실용적인 걸 좋아하거든요.”

그러면서 시문은 서랍 하나를 열어 보였다. 그 안은 잡동사니로 꽉 차 있었다. 이어서 시문은 서랍 몇 개를 열어서 그대로 두거나 닫기 시작했다. 그 수가 열 자리쯤 갔을 때 그는 서랍장 자체를 통째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서랍장 테두리의 나무판을 제외한 서랍장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천천히 열렸다. 그 때문에 바닥을 지저분하게 장식하고 있는 잡동사니들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바닥이 끌려서 흔적을 남기지도 않았다.

티노는 감탄하며 말했다.

“힘이 없으면 열지도 못하겠네요.”

“그렇죠.”

순전히 힘만으로 서랍장을 잡아당긴 시문은 그럼에도 여유가 있는지 미소가 그려진 얼굴로 태연히 대답했다.

비밀통로는 서랍장 너머의 벽에 있지 않았다. 바로 바닥에 있었다. 서랍장과 연결되어 있는지 뚜껑이 열려 있었는데 맨홀 입구처럼 벽에 사다리가 박혀 있는 게 보였다.

“먼저 들어가세요.”

“예.”

티노는 냉큼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그가 어느 정도 내려가자 시문이 따라서 내려왔다. 시문이 뚜껑을 닫자 얼마 후 쿵 하고 묵직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쪽에서 뚜껑을 닫으면 서랍장이 원래대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얼마 안 가 바닥에 발이 닿았다. 대략 이 층 정도 내려온 것 같았다. 조명은 없지만 어디선가 은은하게 빛이 흘러나와서 시문을 위해 옆으로 조금 비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시문이 내려와 조명을 켜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생각나 물었다.

“이 공방은 처음부터 이런 곳을 만들기 위해 지은 거예요?”

“겸사 겸사죠. 전 실용적인 걸 좋아한다니까요?”

좀 전과 비슷한 대답을 하며 시문은 조명을 켰다. 옆으로 비켜선 순간부터 눈을 감고 있었던 티노는 그대로 잠시 있다가 눈을 떴다.

“……!”

넓었다. 시문의 작업실보다도 훨씬 넓고 높았다. 하지만 티노를 놀라게 한 것은 단순한 공간의 크기가 아니었다. 이 공간을 메우고 있는 거대한 기계 장치였다! 램이나 아르카의 작업실과는 규모 자체가 달랐다.

“이게 대체……?!”

시문은 티노가 실컷 구경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두었다. 티노는 조심스럽게 기계 쪽으로 걸어갔다.

기계의 전체적인 외향은 거대한 집게발 두 개가 양쪽으로 벌려져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왼쪽보다는 오른쪽이 더 컸는데 그 아래에 커다랗고 투명한 원통이 있었다. 그 역시도 세척기와 마찬가지로 원석으로 만들어졌다. 크기는 원석 세척기의 반만 했고 상단에는 금속 뚜껑이 덮여 있었다. 그 통의 오른쪽에는 티노도 익히 알고 있는 세척기가 있었다. 그것 역시 공방의 원석 세척기의 반만 했다. 원석으로 된 원통과 세척기 사이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어 오르내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다.

세척기 옆으로는 정제되지 않은 어스듐이 한쪽 벽면까지 잔뜩 쌓여 있었다. 그 벽면에는 티노가 허리를 숙여야 들어갈 수 있을 크기의 화물용 무빙벨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주변 상황을 보건대, 저것은 정제되지 않은 어스듐을 실어 오는 것이지 티노가 언젠가 보았던 창고의 무빙벨트는 아니었다. 세척기 너머로 씨드가 소모된 어스듐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아 티노가 보았던 것은 그쪽에 있지 않을까 싶었다.

왼쪽 집게발의 끝은 잔뜩 벌어져 있고 그 사이에는 세 개의 날카로운 뿔 같은 것이 박혀 있었다. 집게발의 아래에는 금속으로 된 길쭉한 원뿔이 놓여 있는데, 그 위에 황금색으로 빛나는 무언가가 아슬아슬하게 얹어져 있었다. 왼쪽 집게발 사이의 세 개의 뿔은 바로 그것을 겨누고 있었다.

기계를 조작하는 장치는 기계 너머에 있었다. 그것은 책상 형태로 되어 있었고, 그 위에는 수십 개의 버튼과 밸브와 스틱 등이 있었다.

티노는 이 넓은 공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기계의 거대함과 그 정교함 등을 홀린 듯이 감상하다가, 곧 이것이 뭐에 쓰는 물건인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기계공학에 대한 지식이 깊고도 넓은 티노였지만 이것의 정체는 짐작도 안 됐다.

확실한 것은 시문 혼자서 이 일을 벌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램도 아르카도 연구라면 밥 먹는 것보다도 좋아하는 사람들이지만 그 연구들은 대부분 혼자서 하는 것이라 일정 규모 이상으로 커지지 않았다.

연구 자체는 시문 혼자 할지 몰라도 이 일을 그 혼자 벌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몇 년이나 남들 몰래 어스듐을 빼돌린 것도 그렇고, 공방 직원들은 물론 친위대에서도 모르는 비밀 공간을 가진 공방을 짓는 것도 그렇고, 이 정도 기계를 제작한 것도 그렇다.

“시문 님. 이 일은 시문 님 혼자 벌이신 게 아니죠?”

“물론입니다. 많은 분들께 여러모로 지원을 받고 있지요.”

“다들 고위 귀족들이신가요?”

“예. 제가 하고 있는 연구는 고위층이라면 대부분 눈치 채고 있을 겁니다. 깊이 관여하지는 않더라도 누구나 제 연구의 결과물을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지요.”

“그래서 지금껏 들키지 않을 수 있었던 건가요?”

시문은 말없이 미소를 진하게 그려내기만 했다. 그것으로 답이 되고도 남았다.

“그런데 어스듐 때문에 친위대에 꼬리를 잡힌 거군요?”

“티노 군의 안전을 위해서 지금은 밝히지 않도록 하죠.”

시문의 말투도 표정도 전혀 진지하지 않았지만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티노는 그에 대한 것은 더 이상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앞으로 그가 해야 할 일을 위해 알아야 할 것을 물었다. 개인적으로도 가장 궁금한 사항이기도 했다.

“여기서 대체 뭐 하시는 거예요? 저 기계는 뭐죠?”

“일단은 어스듐을 연구하고 있다고 해 두죠. 저 기계는 그것을 위한 것쯤으로 생각하세요.”

“시문 님은 원석 가공 장인이시잖아요?”

“본업은 그렇죠. 하지만 CUA2에서도 제법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 사실 그쪽이 더 천직이긴 하지요.”

“그럼 왜……?”

티노는 자연스럽게 질문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가 할 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문은 티노가 삼킨 질문을 바로 읽어 냈다.

“티노 군 역시 웬만한 코어 제작 전문 기술자보다 더 뛰어나지 않습니까? 그것은 램 장인의 공방에서 일을 했기 때문이겠죠? 제 생각엔 무기 제작 쪽도 상당한 경지일 것 같은데요?”

“그거야 뭐, 어느 정도는요.”

“하지만 친위대에 들어가고 싶어 하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뭘 말씀하시려는지 충분히 알겠어요.”

티노는 가볍게 고개를 끄떡이고 다시 기계를 돌아봤다. 아르카가 와서 봤으면 며칠이고 몇 달이고 눌어붙어서 연구하겠지. 그러다 뜯어볼지도 모르고.

“여기서 제가 뭘 하면 되는 거죠?”

“우선 어스듐을 정제한 뒤 저 용기에 넣으세요. 물론 가장 활성화된 상태로 넣는 겁니다.”

“그럼 한 번에 많은 양은 못 하는데요.”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저 용기에 넣을 수 있는 양도 그리 많지 않으니까요.”

“알겠어요.”

티노는 곧장 정제되지 않은 어스듐 쪽으로 갔다. 그 위에는 나무통이 아무렇게나 얹어져 있었다. 그 나무통에 어스듐을 가득 담아서 세척기 안에 부었다. 그 안에는 예의 시약이 끓고 있었다. 티노가 밤에 몰래 작업했던 것과는 달리 씨드가 풍족한 어스듐이었기에 최대치로 활성화되는 데는 더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때문에 티노는 시문을 돌아보고 물었다. 시문은 어느새 기계 조작대 앞에 가 있었다.

“이거 외에는 할 일이 없나요?”

“현재로서는 없어요. 점심시간 후에 저기 쌓여 있는 원석들을 치우세요. 이쪽 무빙벨트에 쏟으면 됩니다.”

그러면서 시문은 자신의 뒤에 뚫려 있는 또 하나의 화물용 무빙벨트를 가리켰다. 바로 저것이 티노가 보았던 그것과 연결되어 있는 거겠지. 오전에는 수습 기술자가 원석 세척을 하니까 들킬 위험이 커서 점심 이후에 하는 걸 테고.

티노는 우선 원석을 나무통에 담아서 시문이 가리킨 화물용 무빙벨트 옆에 옮겨 놓기로 했다. 원래 쌓여 있는 곳과도 거리가 그리 멀진 않았지만 미리 해 두면 편한데다 당장 할 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기계, 어스듐 소모도 만만치 않겠는데요? 규모만 봐도…….”

“적게 소모하지는 않지요.”

“그런데 용케 안 걸리셨네요?”

도시는 어스듐 라인을 통해서 대형 어스듐의 씨드를 거리의 가로등은 물론 각 가정의 생활동력으로 보급한다. 그리고 각 가정에서 소모한 양을 측정하여 돈을 받는다. 자신이 소모한 것만큼의 어스듐을 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은 돈으로 해결한다.

그에 반해 공방은 그 종류가 어떤 것이든 나라에 소속되어 있어서 그들이 소모하는 어스듐은 나라에서 지원해 준다. 때문에 악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그들이 소모하는 양은 항시 체크된다. 그러다 어느 공방에서 어스듐 소모량이 비상식적으로 많아지면 나라에서 감사가 온다.

다른 공방에 비해 어스듐 소모량이 적을 수밖에 없는 원석 가공 공방에서 이런 어마어마한 기계 장치를 가동했다면 분명 눈에 띄었을 것이다. 기계를 볼 줄 아는 티노는 그 소모량이 어느 정도일지 대략적이나마 짐작이 갔다. 시문은 대수롭지 않은 듯 ‘적게 하지는 않는다.’라고 했지만 그 정도 수준이 아닐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시문의 공방을 잔뜩 경계하며 어떻게든 증거를 잡으려 애쓰는 친위대에게 좋은 빌미가 됐을 텐데…….

이곳에 유입된 어스듐이 저 기계 장치를 운행하기 위해 소모된 것일까? 그렇다면 세척기가 있을 이유가 없지 않나? 일부는 기계 운행에 쓰이고, 일부는 다른 연구를 위해 쓰인 건가?

티노는 기계에 연결된 어스듐 라인을 찾아보았다. 이곳에 유입된 어스듐이 기계 운행에 쓰이고 있다면 도시에 깔려 있는 어스듐 라인과는 별개의 것이 연결되어 있을 테니까.

기계를 꼼꼼히 살펴보자 두 개의 거대한 집게발이 갈라지는 부분의 중앙에 어스듐 라인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나 그 어스듐 라인은 국가에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었다. 미세한 차이지만, 색도 굵기도…….

“어……?”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