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황금의 어스듐 29화

2019-07-15 14:20
제8장 시문 님의 작업실
제8장 시문 님의 작업실
[데일리게임]
제게 필요한 것은 섬세한 기술이 아닌 그 눈썰미입니다.”

“이해할 수 없어요.”

티노는 미심쩍은 눈으로 시문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문은 예의 미소 띤 얼굴로 티노의 질문을 기다려 주었다.

“저 정도의 눈썰미를 가진 사람은 저 말고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요.”

“없지는 않지요. 하지만 그 정도 실력을 가진 자들은 이미 외부에 어느 정도 얼굴과 이름이 알려졌으니 끌어들일 수 없었습니다. 이곳은 원석 가공 공방이니까요.”

“그렇다 해도 신뢰할 수 없는 절 끌어들이시는 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신뢰할 수 없다?”

시문은 재미있다는 눈으로 티노를 바라보았다.

“무기 제작 장인의 손에서 큰 사람을 신뢰할 수 없을 리가요. 티노 군은 기밀유지에 대해 누구보다도 철저하게 교육받은 사람이 아닙니까?”

“……?!”

티노의 머릿속이 순간 새하얗게 비어 버렸다.

“램 장인이라면 수도에서도 이름이 있으신 분이죠. 그런 분의 손자라는 것만으로도 저는 티노 군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아, 알고……?”

간신히 입을 떼었지만 제대로 된 문장을 만들어 내지는 못했다. 하지만 시문은 그것을 쉽게 알아들었다.

“알고 있었냐고요? 물론입니다.”

“어, 어떻……?”

“어떻게 알았냐고요? 제가 제 공방에 들어온 염탐꾼을 조사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신 겁니까?”

티노는 입만 몇 번 뻐끔거리다가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할아버지도 저 여기 있는 거 아세요?”

“말씀드리지 않았습니다.”

“하아…….”

깊이 한숨을 쉰 티노는 고개를 푹 숙이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램이 알게 되었을 때의 반응이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져서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뻔하다. 한 손으론 배를 움켜쥐고 한 손으론 티노를 손가락질하며 낄낄 웃어 대겠지. 그러다 배가 아프다며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계속 웃고, 웃고, 웃을 테고…….

잠깐 사이에 폭삭 늙은 것 같은 방년 16세 티노를 보며 시문은 싱긋 웃으며 제안했다. 자신이 방금 던진 폭탄은 이미 저편으로 가볍게 던져 버린 채였다.

“이번엔 절 돕지 않겠습니까? 제가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죠.”

티노의 머릿속에선 램이 땅을 치며 웃는 것까지 진행되고 있었지만, 주둥이는 이성적으로 움직여 주었다.

“무슨 수로요? 추천을 받는 건 대외적으로 합당한 공을 세웠을 때만 가능하다던데요. 친위대의 경계대상인 시문 님을 돕는 것이 공이 될 것 같진 않은데요?”

“물론 제가 추천을 할 수는 없지요. 하지만 제 이름을 걸고 약속하죠. 제 일이 끝날 무렵엔 티노 군이 원한다면 반드시 사관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해 주겠습니다.”

“싫어요.”

머릿속에서 간신히 램의 광소를 지워 낸 티노는 생각할 여지도 없다는 듯 뚱하게 잘랐다.

“사관학교 입학을 조건으로 이용당하는 건 이제 그만할래요. 그래 봐야 나중에 말 바꾸면 그만인 거잖아요.”

“경험을 쌓더니 조금은 현명해진 모양이군요.”

시문은 불쾌한 빛 없이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런 시문에게 티노는 단호하게 제안했다.

“예. 그래서 이제부턴 그냥 실질적이고 직접적인 보수를 받으며 일하려고요.”

“보수 말입니까?”

시문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예!”

“얼마면 될까요?”

“얼마까지 주실 수 있는데요?”

시문이 자신을 죽이지는 않겠구나, 판단되자 티노의 필요 이상으로 큰 간덩이가 제대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일만 잘 된다면 사관학교에 기부입학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주지요.”

“일이 잘 안 되면요?”

“그 반을 주지요.”

아마도 시문이 맨 처음 제안했던 ‘사관학교 입학’은 기부입학이었던 모양이다. 티노로서는 손해 볼 것이 없었다. 잘되면 기부입학이고, 안 돼도 수중에 돈은 남는다. 하지만 신중해야만 했다.

“나중에 일시불로 주시는 건 아니겠지요?”

“염려 마십시오. 어느 쪽이든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하지만 계약금의 의미로 성공 보수의 1할을 먼저 드리죠.”

“좋아요! 할게요!”

역시 거물급 귀족의 자제! 통도 크고 손도 크다! 아싸, 하고 속으로만 춤추는 티노를 시문이 웃는 낯으로 조용히 불렀다.

“참, 티노 군.”

“예?”

“미리 말해 두겠는데, 만약 티노 군이 정보를 누설할 경우…….”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는 건가요?”

그 정도는 티노도 이미 짐작했던 바였다. 하지만 시문은 티노의 머리꼭대기에서 놀고 있었다.

“설마요. 전 그런 야만적인 짓은 하지 않습니다. 다만 티노 군이 정보를 누설할 경우 저는…….”

시문은 두 손을 눈가에 올리며 한쪽 눈을 감더니 사진을 찍는 듯한 자세를 취해 보였다. 그리곤 셔터를 누르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티노 군이 이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찍어서 램 장인께 보낼 겁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이런 어마어마한 협박을 보았나! 티노는 두 주먹을 움켜쥐고 씩씩하게 대답했다. 그의 태도엔 진실과 성실이 넘쳐흘렀다. 시문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일어났다.

“내일부터는 제 작업실로 바로 출근하세요.”

“넵! 뭐든 시켜만 주십시오!”

시문은 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멈춰서 티노를 슬쩍 돌아봤다.

“아, 이것도 미리 말해 두지요.”

“예?”

천하의 티노도 바싹 긴장하며 시문을 바라보았다. 간신히 지웠던 램의 모습이 다시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제가 티노 군이 정보를 누설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겁니다.”

“안 합니다! 절대로! 결단코!”

티노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지하게 기합을 넣어서 답했다.

다음 날 아침, 티노는 여느 때처럼 아침 일찍 일어나 공방으로 나갔다. 그리고 청소를 하기 위해 걸레를 꺼내는데, 라디가 들어왔다. 요즘 그녀는 전보다 더 일찍 일어나서 티노와 거의 동시에 아침 일과를 시작하고 있었다. 티노를 조금이라도 혼자 두면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라디는 예의상 하는 아침인사조차 없이 곧장 걸레를 꺼내어 티노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자리 잡고 걸레질을 시작했다. 그녀는 티노와 가까이 있고 싶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무던히 노력하고 있는 중이었다.

별 생각 없이 인사를 했다가 무시당한 뒤로는 티노 역시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똑같이 되갚아 주겠다는 유치한 발상이 아니라, 그냥 그에겐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티노는 또래의 유치한 장난이나 악의에 장단을 맞춰 줄 정도로 성숙하진 못했지만 그에 휘말릴 정도로 어리지도 않았다.

피차 말없이 청소에만 집중한 덕에 예전보다 더 빨리 끝났다. 다음은 티노에게 있어 가장 유감스러운 아침식사 시간이었다. 라디는 오늘도 득의양양하게 실력을 뽐내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요즘 소모하는 식재료들은 예전보다 몇 배는 다양하고 고급이었다. 시문이 통이 크다 못해 씀씀이가 헤프니까 가만히 있는 거지, 램의 공방에서 고작 아침식사에 저 정도 식재료를 소모했다면 크게 혼났을 것이다.

티노는 시문에게 배달될 라디의 요리를 생각하며 간단하게 빵만 챙겨서 라디를 따라가 볼까 잠깐 고민해 보았다. 어쩌면 시문에게 빌붙어서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건 좀 구차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엇보다도 시문이 자신의 아침을 기꺼이 내어 줄 정도로 오지랖 넓은 사람일 것 같진 않았다.

웨이는 여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전처럼 라디의 요리가 다 끝난 다음에나 너저분한 모습으로 휘적휘적 나타났다. 그리곤 전보다 더 뻔뻔하고 당당한 태도로 라디가 차려 놓은 요리를 먹었다. 그가 부지런을 떠는 것은 티노를 괴롭힐 때뿐이었다.

티노는 빵을 두툼하게 썰어서 버터를 듬뿍 발라 구운 뒤 계란 프라이를 그 위에 얹는 것으로 아침 준비를 마쳤다. 그것을 한 입 크게 베어 물고 우유와 과일을 꺼냈다. 과일은 조끼 주머니에 찔러 넣고 우유를 한 컵 따랐다. 그리곤 선 채로 토스트를 전부 먹어 치우고 우유를 한 번에 마셔 버렸다. 과일은 후식이었다.

온갖 기교가 들어간 라디의 요리는 티노가 과일을 전부 먹어 치울 때쯤에야 끝났다. 그나마도 재료 손질을 어제 저녁에 해둬서 짧게 끝난 것이었다. 라디는 요리를 공들여서 접시에 담고, 그 접시를 쟁반 위에 보기 좋게 배치한 뒤 마치 개선장군처럼 어깨를 쭉 펴고 티노를 지나쳐 부엌 밖으로 나갔다. 그 뒤를 티노가 태평한 걸음걸이로 따랐다.

라디는 자신을 따라오는 티노를 의식한 듯 자꾸만 힐끔힐끔 뒤를 돌아봤다. 티노는 두 손을 깍지 껴서 뒤통수에 댄 채로 느긋하게 걷기만 했다. 라디를 쫓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자신의 길을 가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라디는 모르겠지만 그게 사실이기도 했다.

티노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은 마음과 시문과 만나는 즐거운 시간을 방해받고 싶지 않은 마음, 혹시 티노가 라디와 웨이의 행동을 고자질하려는 것은 아닐까 불안해하는 마음 등이 복잡하게 뒤섞여 라디의 속을 시끄럽게 했다. 결국 시문의 작업실로 가는 두꺼운 철문 앞에 선 라디는 그 옆에 벨을 누르지 않고 뒤를 홱 돌아보았다. 시문이 먹을 요리가 담긴 쟁반을 손에 들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에 비해 몸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왜 따라오는 거야?”

“내가? 누굴?”

라디가 왜 저렇게 반응하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적의로 똘똘 뭉친 그녀에게 친절하게 답하고 싶지도 않았다. 티노는 깍지 낀 손을 내리며 라디 옆으로 걸어와 문 옆의 벨을 눌렀다.

“뭐 하는 거야?!”

라디는 자신의 신성한 영역을 침범한 티노를 충격과 분노로 범벅이 된 눈으로 노려보았다.

“난 아침식사를 끝냈거든.”

“그래서?”

“그래서 이젠 일을 할 시간이라는 거지.”

수습 기술자에겐 아침식사가 끝난 시간이 곧 출근시간이었다. 어젯밤 시문은 자신의 작업실로 바로 출근하라고 했고 티노는 그에 성실하게 응하고 있는 것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부터 원석 세척 및 원석 수거는 할 수 없게 됐다는 말을 해야 했다.

“아! 아침에 말한다는 게 깜박했네.”

“뭐가?”

“나 오늘부터…….”

덜컹.

미처 말을 다 꺼내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시문이 나왔다. 라디는 티노와 대화중이었다는 것을 홀라당 까먹고 냉큼 돌아서서 인사했다.

“시문 님! 안녕히 주무셨어요?”

“예, 라디 양.”

시문의 시선은 라디 너머의 티노에게 향해 있었다.

“벌써 출근한 겁니까, 티노 군?”

“예, 식사가 일찍 끝나서요.”

“그렇군요. 들어오십시오.”

“예?!”

기함하며 끼어든 것은 라디였다. 매일매일 하루 세 번씩 꼬박꼬박 식사를 배달하는 그녀조차 이 문 안으로는 한 걸음도 들어가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직원들에게 불가침 구역인 시문의 작업실에 신참인 티노가 들어간다니! 그것도 실수나 착오가 아니라 시문의 지시로! 이 얼마나 분한 일인가!

그런 라디의 서운한 마음도 몰라주고 시문은 오히려 이상하다는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티노는 그가 그녀의 심중을 몰라서 저러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왜 그러죠, 라디 양?”

“아니……, 지금 티노한테 시문 님의 작업실로 들어오라고…….”

“그게 무슨 문제라도?”

“그건 아니지만…….”

라디는 이젠 아예 울어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시문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시문은 예의 미소 띤 얼굴로 라디의 손에서 쟁반을 받아 갈 뿐이었다.

“오늘도 멋진 요리군요. 잘 먹겠습니다.”

“예…….”

보통은 이 정도의 말에도 기뻐서 황홀해하는 라디였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녀의 옆에 시문의 작업실에 초대(?)받은 티노가 있었으니까.

본의는 아니지만 ‘라디의 시문 님’을 앗아가 버린 꼴이 된 티노는 볼을 긁적였다. 티노에겐 아무 의미 없는 일을 가지고 라디는 하늘이 무너진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승림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