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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석] 말 대신 e스포츠를 좋아했더라면

이시우 기자

2016-11-01 15:36

온 나라가 시끄럽다. 너무 시끄러워서 게임이 손에 안 잡힐 지경이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한 최순실이란 사람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국정을 농단했고, 그녀의 딸 정유라는 '공주' 대접을 받으며 부정을 일삼고 온갖 특혜를 받은 사실이 알려지며 온 국민이 분노를 느끼고 있다.

정유라의 승마 활동을 위해 온 우주가 나서서 도와줬는데, '종주국'이라는 타이틀 아래서 실제로는 외면 받는 종목인 e스포츠 업계 종사자의 한사람으로서, 만약 정유라가 승마가 아니라 게임을 즐기고 프로게이머에 뜻을 뒀다면 어땠을까 하는 불순한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로 정유라가 승마가 아닌 게임과 e스포츠에 큰 관심을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최순실에게 줄을 대고 있던 문화체육관광부 인사들이 어떻게든 시장을 키우려 하지 않았을까.

고영태가 펜싱 선수가 아니라 프로게이머 출신이었다면, 체육인들을 위해 설립했다는 더 블루K가 e스포츠 진흥에 힘썼을까.

최순실은 평창 올림픽에도 손을 뻗쳤다는데, 따님을 위해서라도 IeSF가 그토록 소원하던 e스포츠의 올림픽 입성에 도움을 주지 않았을까.

물론 여기까지는 말도 안 되는 억지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게임산업과 밀접한 관계에 있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송성각 원장도 이번 사태에 연루되는 바람에 사퇴했는데, 게임산업이 받았어야할 지원들이 다른 곳으로 흘러갔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데, 한 단체의 사업방향을 바꾸는 것쯤이야 일도 아니다.

이 뿐만이 아니다. 삼성전자의 후원을 받아 열리던 세계 최고의 e스포츠 대회 WCG는 삼성전자의 후원이 끊기면서 지난 2013년 대회를 끝으로 14년 역사의 막을 내렸다. 유럽에서는 파리 생제르맹, 맨체스터 시티 같은 정통 스포츠 클럽들이 뛰어들 만큼 e스포츠 시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있는데, 삼성전자는 '역주행'을 택했다. WCG가 계속해서 존재했다면 2017년에는 피파 종목에서 유럽 명문 축구팀들의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 각축을 벌였을 것이다.

삼성전자는 정유라에게 200억 원을 후원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고, 공교롭게도 삼성전자 사장은 대한승마협회장을 겸하고 있다. 지출을 줄이겠다고 WCG를 없앤 삼성인데, 의혹이 사실이라면 말타기를 좋아하는 한 20대 초반의 여성에게 그 돈을 갖다 바친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최근 삼성전자는 연일 뻥뻥 터지는 갤럭시 노트7 때문에 브랜드 이미지가 곤두박질쳤는데, 삼성 갤럭시 프로게임단은 롤드컵에서 역대급 결승전을 연출하며 준우승이라는 쾌거를 이룩, 갤럭시라는 브랜드를 긍정적 이미지로 탈바꿈시켰다.

안전상의 이유로 비행기도 타지 못하게 된 브랜드인데, 멋진 경기를 펼친 삼성 선수들 덕택에 수많은 미국 팬들은 로스앤젤레스 스테이플스 센터에서 "렛츠고 삼성"을 연호했다. 이는 수십, 수백억 원을 마케팅에 쏟아 부어도 하지 못할 일이다.

이처럼 e스포츠는 효율 높은 마케팅 수단이고 투자할만한 가치가 있는데, 높으신 분들은 애먼 곳에 돈을 쓰고 있으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시장조사기관인 뉴주가 최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대 초반에서 30대 중반까지의 미국 남성들의 e스포츠 시청률은 프로야구와 비슷하고 아이스하키보다 높은 것으로 보고됐다. 한국은 e스포츠에서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강국이고, 투자 대비 높은 효율을 내고 있다. 알토란도 이런 알토란이 없는데, 최근의 상황들을 짚어보면 e스포츠가 주류 콘텐츠로 올라서는 것은 여전히 요원하기만 하다.

'페이커' 이상혁이 박찬호나 김연아도 해보지 못했던 플레이어 트리뷴 기고를 한국인 최초로 해냈고, 전 세계 누적시청자가 4억 명을 넘길 것으로 예상되는 롤드컵에서 SK텔레콤 T1이 3연패를 달성했는데도 공중파를 비롯한 주류 언론에서는 이를 다뤄주지 않고 있다. 포털 사이트의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차지한 '롤드컵'이란 키워드에 대해 받아쓰기만 실컷 있었을 뿐이다.

도대체 얼마나 더 위대한 업적을 쌓아야 e스포츠가 주류 문화로 거듭날 수 있을지 궁금하다. 정말로 권력과 연결된 누군가의 부정한 방법을 통해서만 e스포츠가 제대로 된 대우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불편한 생각까지 들 정도다. 업계 종사자로서 고민이 깊어지는 시국이다.


이시우 기자(siwoo@dailyesports.com)

이시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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