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탈리퍼 17화

2019-07-15 16:49
메탈리퍼 17화
[데일리게임]

대재앙이 끝난 지 벌써 10여 년. 아직까지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대재앙 때 일어난 대지진을 이겨 낸 기존 건물을 보수하거나 개량해서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새롭게 지어지는 건물들은 보다 다양한 형태로 건축되기 시작했다. 특히 정원까지 플레이그 스톰으로부터 보호받는 건물들의 개발은 사람들의 쾌적한 거주 지역을 한층 넓게 만들었다.

좁아터진 실내가 아닌 정원까지 안전한 신형 주택들은 안전과 쾌적함을 모두 만족시키는 최적의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반경 20킬로미터에서 한 번도 규모가 큰 플레이그 스톰이 일어난 적이 없는 노만 마을에서 그런 신형 주택은 왠지 가진 자의 사치로 보일 뿐이다.

신공법으로 지어진 새로운 스타일의 건물 외관이 신기한 듯 아이딘은 저택을 먼발치로 이리저리 살펴보다 가던 발걸음을 계속했다. 그러나 발걸음을 몇 걸음 내딛기도 전이었다.

쾅…… 쾅…… 쾅……!

엄청난 폭음과 함께 후끈한 열기가 저 멀리서 느껴진다.

‘뭐야? 이런.’

아이딘은 이상을 감지하자마자 빠르게 저택으로 달려간다. 저택은 큰 폭발음과 함께 투명한 플랙시 유리로 만들어진 돔이 완전히 날아가 버려 마치 모자 뚜껑이 날아가 버린 형상이 되었다.

아이딘이 저택 입구에 다가서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밀물처럼 건물을 빠져나오고 있었다. 눈에 익은 경비대원들 몇 명이 상황을 정리하려 했으나 역부족인 듯싶었다. 이때 낯익은 경비대원 하나가 아이딘에게 달려온다. 그를 며칠간 취조했던 미하일 중위였다.

“아이딘. 큰일이다! 아직 네 사촌형이 저기 건물 안에 있다.”

아이딘의 팔뚝을 잡고 가쁜 숨을 몰아쉰다.

자신의 사촌형이라는 말에 아이딘은 의아스러웠지만 곧 그가 경비대장 란돌을 뜻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이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작스런 폭발과 화재에 모두 제정신이 아니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 ‘루체’, ‘폭탄’, ‘테러’라는 단어가 교차적으로 들려왔다. 아이딘이 주변 상황을 좀 파악해 보니 루체 왕국이 루드 의원을 노리고 저지른 폭탄테러라는 것 같다. 그리고 이번 테러는 루체와의 접전지역과 비교적 가까운 하바로프이고, 손에 꼽힐 만한 정부 고위 의원이 연결되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는 예상되었던 일이었다. 얼핏 봐도 전직 의원에 눈에 들기 위해서라고 보기만은 힘든 너무나 많은 수의 경비대원들이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딘, 어떻게 하지?”

이미 연기에 까맣게 그을린 미하일 중위가 아이딘에게 의논한다. 그나마 미하일 중위가 동분서주하여 대다수의 인원이 무사히 화재현장을 벗어나긴 했지만 마을 사람들이 곧잘 비꼬곤 하던 ‘사고가 종료되면 나타난다’는 모토에 충실한 경비대로서 현재 진행 중인 이 사고의 처리는 너무 힘에 부치는 듯싶었다. 그러나 아이딘으로서도 딱히 방법이 없다. 좀 더 상황을 지켜보는 수밖에.

쾅!

또 한 번의 폭음과 함께 불기둥이 솟아오른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사람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기에 정신없다. 무능하긴 하지만 그래도 책임감 하나는 끝내주는 경비대원만이 비교적 안전한 은폐물 뒤에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다.

“저기 대장님이…….”

한 경비대원이 가리키는 3층 창문에서 경비대장 란돌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연기에 질식되어 쓰러진 듯 란돌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란돌 경비대장의 위치를 파악한 아이딘은 먹잇감을 찾은 독수리처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너진 입구를 포기하고는 비교적 화염이 약한 1층 창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미하일 중위가 경비대원의 호스로 아이딘의 움직임을 돕는다.

쨍그렁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어지며 아이딘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1층은 이미 뜨거운 열기와 유독가스가 실내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매우 심각한 상황이겠지만 아이딘에게는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었다.

아이딘은 재빨리 계단을 타고 올라가 3층으로 올라갔다. 문을 부수고는 자신의 피가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사촌형 란돌 대장을 들쳐 업고는 바람같이 2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란돌 대장을 업은 채 그대로 뛰어내린다. 마치 뛰어난 체조선수가 텀블링을 하고 착지하듯 노련한 동작이다.

그제야 뜨거운 열기를 피해 은폐물 뒤에 숨어 어쩔 줄 모르던 경비대원들이 아이딘으로부터 경비대장을 받아 든다.

잠시 후 맑은 공기에 정신이 돌아온 듯 란돌 경비대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다,

“아직 루드 의원과 딸이 아직 저기에…….”

그가 다시 건물을 가리킨다.

내진설계로 어지간한 외부 충격으로부터 충분히 버틸 수 있게 설계된 건물임에 불구하고 폭탄으로 인한 내부의 충격과 연이은 화재로 이내 건물들이 조금씩 무너지며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어 보였다.

“이제는 됐어, 아이딘…… 충분히 할 만큼 했어. 어서 상처나 치료하자고…….”

미하일 중위가 연기에 그을려 숯검정처럼 변해 버린 아이딘과 그의 얼굴에 난 상처들을 안쓰러워한다. 하지만.

“그만해…… 아이딘. 이러다 너도 죽는다니까.”

아이딘은 미하일 중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무너지기 직전의 건물로 뛰어 들어간다.

아이딘은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환청 같은 소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 아니 그 소녀…… 그 소녀가 자신을 애절하게 부르고 있었다.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제발.’

란돌 경비대장을 구하기 전까지만 해도 그냥 환청인 줄 알았다. 그러나 란돌을 구하러 건물 안에 들어갔을 때부터 그 목소리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런 무언의 전달. 아이딘의 기억 속에 이러한 무언의 대화가 그리 낯설지 않고 익숙하게 느껴졌다. 환청이 아니다. 이건 텔레파시다. 불길 속에 오도 가도 못하는 소녀의 공포 어린 목소리가 또다시 아이딘을 움직였다.

들리지 않아 더욱 애처로운 그녀의 목소리가 아이딘의 심장을 더욱 빠르게 고동치게 했다. 그녀가 있는 곳은 3층에 있는 작은방.

그녀가 그곳에 있는지 없는지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그녀는 그곳에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이유도 영문도 모르겠다. 그냥 아이딘의 머리에는 당연하다는 듯이 그녀의 위치가 떠올랐다.

무너진 계단을 한달음에 뛰어넘고 불타는 책상과 무너지는 기둥 몇 개를 아슬아슬하게 피하고 나서야 3층에 다다랐다. 탁한 숨을 몰아쉬는 아이딘은 방 앞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중년의 남자. 한눈에 봐도 꽤나 좋은 슈트 차림. 분명 루드 의원일 것이다.

아이딘은 루드 의원의 얼굴을 돌려 상태를 살펴보았다. 아직은 가느다랗게 숨을 쉬고 있었다. 루드 의원을 잠시 추스른 아이딘은 작은 방의 문을 열려 했다. 그러나 손잡이가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순간 멈칫하고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딱히 손잡이를 잡지 않고 문을 열 도구가 눈에 띄지는 않았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수는 없다고 생각한 아이딘은 맨손으로 손잡이를 잡았다.

지지직…….

살이 타들어 가는 매캐한 냄새가 곳곳에 퍼졌다. 그러나 아이딘은 마치 남의 일인 양 개의치 않았다. 일반 사람이라면 엄청난 통증을 느꼈을 테지만 아이딘은 그저 별다른 느낌 없이 자신의 일에 집중했다.

문이 열린 방 안은 이미 불구덩이로 변해 있었다. 천장까지 치솟은 불길은 문이 열림과 동시에 더욱 맹렬히 불타올랐다. 곧 방 전체를 뒤덮을 것 같았다. 시간이 없었다.

그때 아이딘은 책상 밑에 웅크리고 있는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이자벨. 네가 이자벨이구나?’

‘네…….’

아이딘의 말에 소녀가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가 말하지 않아도 아이딘은 그녀의 이름을 알 수 있었다. 소녀와 아이딘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교감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책상 위로 천장이 일순간에 무너져 내렸다.

“안 돼!”

아이딘의 비명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던 천장의 블록과 불덩어리들이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이 멈추어 선다. 마치 영화의 스톱모션과 같은 장면이었다. 이자벨은 그사이 아이딘 쪽으로 빠르게 기어 나온다. 이자벨이 책상을 벗어나자마자 불덩어리들은 책상을 뒤덮어 버리고 붉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더욱 기승을 부린다.

아이딘은 이자벨을 안아 일으키면서 자신의 숨겨진 능력에 다시 한 번 놀랐다. 자신에게 염력이 있다는 것을 비로소 오늘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문득 자신의 손바닥을 보았다. 예상했지만 화상을 입은 손바닥이 벌써 아물어 가기 시작했다.

더 이상 깊은 생각을 하기에는 너무나 상황이 급박했다. 일단은 이곳을 벗어나는 것이 급선무였다. 아이딘은 이자벨을 안고 루드 의원을 등에 업은 채 빠르게 입구를 찾아 나갔다.

한편 건물 외부에서는 더욱 거세지는 불길에 모두가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때마침 경비대원들이 소방차를 몰고 왔으나 거침없이 타오르는 불길에는 역부족이었다. 구닥다리 소방차 3대로 온 건물에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잡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때 경비대장이 란돌이 몸을 추스르며 일어나 지시한다.

“브라이트 하사. 저 2층에 있는 창문으로 소방호스를 집중해서 불을 진화하도록…… 어서!”

“그렇지만 대장님. 거기는 이미 불길이 너무 거세어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다른 쪽에 더 문제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란돌 경비대장이 버럭 한다.

“어서! 시간이 없다고! 명령이다. 어서 호스를 저쪽으로 집중해!”

“네…….”

브라이트 하사를 포함한 경비대원들은 더 이상 명령에 토를 달지 못하고 소방호스 모두를 2층 창문으로 집중시킨다. 강한 물살에 창문이 깨지면서 불길이 사그라지지만 다른 곳은 한층 더 불타오르기 시작한다.

2층 창문의 불길이 잠깐 잦아지는 그때, 2층 창문에서 아이딘이 또다시 뛰쳐나온다. 두 명을 안고 업은 상태였지만 역시 능숙하게 착지에 성공한다.

“와! 루드 의원님이다!”

불을 끄던 경비대원들이 환호한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리에 주저앉은 아이딘을 뒤로하고 루드 의원과 이자벨의 생사를 확인한 경비대원이 모두 살아 있다는 말을 외치자 모두가 와 하는 함성을 질러 환호했다. 모두가 무사하다는 기쁨의 함성에 놀라기라도 한 듯 건물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이제 더 이상의 진화작업은 필요치 않았다. 이렇게 노만 마을에서 가장 크고 높았던 루드 의원의 저택은 루체 왕국의 테러로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흉측한 콘크리트 잿더미로 돌변해 버렸다.

* * *

루체 왕국의 테러로 살 곳을 잃은 루드 의원은 경비대장 란돌의 배려로 경비대 건물 뒤편에 있는 경비대장의 관사에 잠깐 머물게 되었다. 루드 의원은 극구 사양했으나 루체 왕국의 테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관사에 있어 달라는 경비대장의 말을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경비대원들 역시 이쪽이 훨씬 편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경비대 뒤편 정원에서 이자벨과 루드가 정겹게 서 있다. 불타 버린 저택의 정원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관목 몇 개 서 있는 볼품없는 정원이었지만 그들 부녀에게는 그 어떤 곳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아빠.”

이제는 얼굴에 활기를 되찾기 시작한 이자벨이 아빠 루드의 손을 잡아끈다.

“아앗.”

잠깐이지만 통증에 얼굴이 찌푸려진다. 이자벨이 당황하며 울먹인다. 루드 의원이 그런 이자벨을 따뜻하게 안아 준다.

“아빠, 미안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이 순간 루드는 기쁨과 행복에 벅차오른다.

“그래, 이자벨. 아빠도 너를 사랑한다.”

양손에 붕대를 칭칭 감은 손으로 이자벨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아빠, 많이 아프지요?”

“아니, 하나도 아프지 않아.”

‘이자벨이 이렇게 웃고 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는 거니?”

“네. 아빠.”

이자벨의 눈에 눈물이 글썽인다.

그녀에게 언제나 아빠는 일밖에 모르는 존재였다. 엄마와 언니 그리고 이자벨도 언제나 뒷전이었다.

그날도 루드는 일 때문에 가족과 함께할 수 없었다. 이자벨은 교통사고로 부서진 차 안에서 꼬박 하루를 살려 달라고 울부짖었다. 사고로 피투성이가 된 엄마가 그리고 언니가 자신을 걱정하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빠는 과연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생각했었다. 그리고 결론은 아빠는 그들 모두를 버린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엄마와 언니가 없는 이 세상에 이자벨 혼자만 남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자벨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외로웠다. 무서웠다. 하루라도 빨리 사랑하는 엄마와 언니를 따라가고 싶었다. 루드가 뒤늦게 나타나 그런 그녀를 위로하려 했지만 아빠는 위선자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날 이후 이자벨에게는 루드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엄마와 언니만을 따라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날 새로 지어진 그 집이 불타던 날. 이자벨은 루드의 사랑을 보았다. 문밖에서 절규하던, 그리고 미안하다던 아빠의 목소리는 진심이었다. 그런 아빠 역시 이자벨을 떠나간다는 사실에 한없이 두려웠고 그 불속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리고 아빠를 구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곳에 아이딘이 있었다. 자신을 위해 불 속을 뛰어든 아이딘이.

* * *

루드 의원 저택의 대화재가 일어난 지 벌써 나흘이 지났다. 사건이 일어난 직후 아이딘은 밀려오는 피로감으로 꼬박 하루 동안은 잠만 잤다.

화상을 입은 손과 자잘한 상처들은 예상했던 대로 이미 아문 지 오래다. 약간의 흉터는 남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아무 이상도 없다. 단지 어제는 하루 종일 코피가 흘러 고생이었다.

아이딘은 불현듯 자신의 그 알 수 없는 능력과 자꾸만 쏟아지는 코피가 무엇인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생각해 보니 이전에 헥터나 괴물과 싸울 때도 코피가 조금씩 흘러나왔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때는 잠깐 코피가 나는 것이라 생각해서 별 신경을 쓰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근 하루 동안 코피가 멎지 않아 꽤나 신경이 쓰였다.

뛰어난 신체 능력, 재생 능력, 거기에 텔레파시 그리고 염력까지…….

강성욱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