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라-아만전사 카르고 18화

2019-07-15 11:15
제6장 카누바라크가 남긴 풍성한 전리품
제6장 카누바라크가 남긴 풍성한 전리품
[데일리게임]

레어로 들어간 카르고는 즉각 카누바라크가 있는 중심부를 향해 이동했다. 과거 동료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이 퀘르바임 사냥을 해 보았기 때문에 레어의 구조에 대해서는 훤했다.

경험에 따르면 레어의 초입 부근에서 카누바라크를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통로가 워낙 좁아 제대로 회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대로 싸우려면 통로가 다소 넓고 공동이 이리저리 뚫려 있는 중심부로 들어가야 한다.

지금껏 카누바라크 사냥에 나선 파티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레어로 진입해 들어갔다. 그러다가 좁은 통로에서 카누바라크를 만나 제대로 손도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당해 버렸다. 그러나 카르고는 들어가자마자 망설임 없이 좁은 통로를 내달렸다. 기척을 느끼고 마중 나오는 카누바라크보다 빨리 중심부에 진입해야 사냥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사실 좁은 통로에서의 이동속도는 인간보다 카누바라크가 월등히 빠르다. 수백 개의 발을 가진 카누바라크는 거의 말이 달리는 것과 동일한 속도로 터널을 이동할 수 있다. 때문에 지금껏 사냥을 나선 인간들 중 중심부로 들어간 파티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카르고는 험준한 광산에서 채굴을 하는 아만족의 전사이고, 좁은 통로의 이동속도는 인간보다 몇 배나 빨랐다. 게다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전력질주를 했다. 그 덕에 카르고는 카누바라크가 덮치기 전에 중심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이어지는 전투는 완전히 카르고의 페이스였다. 퀘르바임 종류의 공격패턴은 지극히 단순하다. 기껏해야 독액을 뿜어 상대를 녹이거나 거대한 턱으로 짓이겨 버리는 것이 전부였다.

만약 좁은 통로였다면 꼼짝없이 독액을 뒤집어쓸 수밖에 없다. 턱을 이용한 공격도 피할 방도가 없다. 그러나 이곳은 통로가 거미줄처럼 뚫린 데다 카누바라크가 식량을 보관하기 위해 뚫어 놓은 공동이 이곳저곳에 자리 잡고 있는 장소이다. 게다가 턱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면 독액이 방사되는 형태나 방향을 짐작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다.

카누바라크는 꽤나 여러 형태로 독액을 방사한다. 스프레이처럼 넓게 뿌리기도 했고 강력한 물총처럼 일직선으로 내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수많은 퀘르바임을 사냥해 본 덕에 카르고는 지극히 효율적으로 독액을 피할 수 있었다. 턱의 움직임만 보면 카누바라크가 어떻게 독액을 내쏘는지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전사 특유의 빠른 몸놀림은 턱을 이용한 공격도 모두 무위로 돌렸다.

“조그마한 녀석들이 떼거지로 덤벼드니 꽤나 골치 아팠는데 덩치 큰 녀석은 그럭저럭 상대하기 편하군.”

오칸과의 전투를 떠올려 본 카르고가 조심스럽게 동굴의 천정으로 이동했다. 자욱한 흙먼지가 기척을 감춰 주었기에 카누바라크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동굴 속으로 거대한 머리통을 들이밀었다.

순간 카르고의 눈이 빛났다. 몇 되지 않는 카누바라크의 급소가 드러난 것이다.

‘기회다!’

카르고가 머뭇거림 없이 뛰어내려 카누바라크의 머리통에 달라붙었다. 그것을 감지한 카누바라크가 급히 머리를 뒤흔들었지만 카르고를 떨칠 수는 없었다. 납작하게 붙은 상태로 카르고가 칼리아스를 휘둘렀다.

쾅!

둔중한 소리와 함께 카누바라크의 머리 윗부분에 금이 갔다. 한 번 더 내려치자 쫙 갈라지며 체액이 튀어 올랐다. 카르고가 급히 몸을 피했다. 퀘르바임 종류는 체액에도 극독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미 여러 번 공격받았기에 카누바라크의 머리 윗부분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카르고는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이용해 또다시 몸을 숨겼다. 그로 인해 카누바라크는 카르고의 종적을 또 놓쳐 버렸다.

퀘르바임형 몬스터는 더듬이를 이용한 촉각과 예민한 청각을 이용해 적의 위치와 움직임을 감지한다. 그 감각이 카르고의 적절한 대처로 인해 마비되어 버렸다. 카르고는 끊임없이 도끼로 동굴의 벽을 두들겼다. 후두둑 떨어져 내리는 돌덩이와 확 피어나는 흙먼지는 카르고의 종적을 감쪽같이 숨겨 주었다.

키에에에엑!

카누바라크는 극도로 분노에 휩싸여 울부짖었다. 지금껏 수많은 모험가들의 육신을 먹이로 삼아 왔지만 지금처럼 그를 곤란하게 만든 놈은 처음이었다. 그것도 단 한 마리만 들어와서 자신의 강인한 갑옷에 흠집을 죽죽 내 놓았다. 그러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분노한 카누바라크가 레어를 마구 뒤집었다. 수백 개의 발이 달린 기다란 몸이 동굴 벽면을 잇달아 강타했다.

쾅! 콰콰쾅!

그러나 화풀이 삼아 한 행동은 도리어 카르고를 도와주고 있었다. 카르고는 공동 하나에 몸을 숨긴 채 기회를 보고 있었다.

‘이번에 승부를 본다.’

이미 아까 가한 공격으로 카누바라크의 머리 표피가 완전히 으깨어진 상태였다. 그 아래에는 카누바라크의 치명적인 급소라고 할 수 있는 뇌가 있다. 뇌를 공격받는다면 제아무리 강력한 몬스터도 버텨 낼 방도가 없다. 그 사실을 떠올린 카르고가 조바심을 억누르며 결정타를 날릴 순간을 기다렸다.

기다렸던 기회는 오래지 않아 찾아왔다.

‘지금이다!’

밉살스런 먹잇감을 찾기 위해 카누바라크가 큼지막한 머리를 공동 안으로 밀어 넣었다. 카르고가 때를 놓치지 않고 몸을 날렸다. 손에 든 칼리아스가 정확히 카누바라크의 뇌가 있는 부분을 향해 내려찍혔다.

“아무래도 카르고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군.”

두카가 수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카르고가 말한 열 시간이 거의 가까워지고 있었다. 세실리아 역시 애타는 표정으로 두 손을 모았다.

“그래도 약속 시간까지는 기다려야지?”

“마땅히 그래야지. 하지만 생환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아.”

그 말에 동의하는지 포르나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눈에 비친 카르고는 정말로 믿음직스러운 전사였다. 그런 전사가 죽었다고 생각하니 맥이 탁 풀렸다.

바로 그때 두카의 귀가 쫑긋했다.

“레어에서 뭔가 소리가 들려.”

얼굴에 기대감을 떠올린 파티원들이 재빨리 레어 입구로 접근했다. 두카가 동굴 벽에 귀를 가져다대고 소리를 엿들었다. 그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뭔가 묵직한 것이 기어 나오고 있어. 매우 커.”

“그, 그럼 카르고 님은…….”

두카가 어두운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카르고는 아니야. 아무래도 카누바라크 같은데?”

“그, 그럼…….”

세실리아의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정황을 보니 카누바라크가 카르고를 잡아먹은 뒤 나머지 일행을 찾기 위해 레어에서 기어 나오는 것 같았다.

파티원들이 조심스럽게 뒤로 물러났다.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말이 묶인 곳까지 물러서자 포르나가 주문을 외워 결계를 쳤다. 카누바라크의 이목으로부터 동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숨을 죽이고 지켜보는데 동굴 입구에서 뭔가가 튀어나왔다. 일행의 얼굴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역시…….’

동굴 입구로 머리를 내민 것은 거대한 지네의 머리통이었다. 흑록색의 표피에서는 번들거리는 윤기가 흘렀고 거대한 턱은 금속으로 된 판금갑옷조차 단번에 동강 낼 정도로 단단해 보였다.

쿠르르르.

동굴에서 기어 나온 카누바라크가 망설임 없이 결계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일행의 얼굴이 삽시간에 흙빛이 되어 버렸다.

“걸렸군.”

“어, 어떻게 해?”

당황하는 사이 카누바라크가 결계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들이 긴장하는 순간 카누바라크의 거대한 머리통이 맥없이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그리고 그 아래에서 누군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좀 늦었다. 많이 기다렸지?”

익숙한 음성. 세실리아가 눈물을 흩뿌리며 달려 나갔다.

“카르고! 무사하셨군요!”

“말했잖아. 퀘르바임 종류는 하도 많이 사냥해 봐서 잡는 것이 식은 죽 먹기라고 말이야.”

포르나의 눈은 경악으로 툭 튀어나왔고 두카는 환호성을 지르며 달려 나갔다.

“와! 역시 멋진 친구로군! 세상에 혼자서 카누바라크를 사냥하는 전사가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믿지 않을 거야.”

그때 달려가던 두카가 기겁했다. 큼지막한 카누바라크의 턱과 더듬이가 파르르 경련하는 것을 본 것이다.

“이, 이놈 아직 안 죽었어!”

그 말을 카르고가 받았다.

“당연하지. 이놈을 레어 안에서 죽이면 신력이 헛되이 흩어져 버리잖아? 그래서 기절만 시켜서 끌고 나왔다. 치가 떨릴 정도로 무겁더군. 어쨌거나 모두 이곳으로 모이도록 해. 숨을 끊으면 흘러나올 신력을 받아들여야지.”

일행이 입을 딱 벌렸다. 그 악명이 자자한 카누바라크를 죽이는 것도 아니라 기절시켜 끌고 나왔다는 말에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입을 딱 벌린 채 쳐다보는 시선을 받으며 카르고가 턱을 긁었다.

“시간이 없다. 조금 있으면 이 녀석이 깨어날 것이다. 칼리아스의 뒷면으로 뇌를 살짝 두들겨 기절시킨 것뿐이라고.”

그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린 파티원들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세 명 모두 카누바라크의 머리 주변으로 바짝 붙은 것을 확인한 카르고가 카누바라크의 머리 위로 올라갔다. 그런 다음 칼리아스를 뽑아들어 하늘 높이 쳐들었다.

“튀는 체액을 조심해. 독이 있으니까 말이야.”

말을 마친 카르고가 망설임 없이 칼리아스를 내려찍었다. 날카로운 도끼날이 부서진 껍질 안쪽으로 살짝 드러난 뇌에 정통으로 틀어박혔다. 경고와는 달리 체액이 일행 쪽으로 튀는 일은 없었다.

퍼어억!

허연 뇌수가 바닥에 흩뿌려지며 카누바라크의 거체가 마치 벼락이라도 맞은 듯 펄쩍 뛰었다. 뇌가 파괴되자 카누바라크는 대번에 절명해 버렸고 몸속에 쌓여 있던 신력이 사방으로 방출되기 시작했다.

쉬이이익.

물론 신력의 대부분은 머리를 밟고 있던 카르고와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세실리아, 포르나 그리고 두카의 몸으로 집중되었다.

“아아아…….”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느낌에 포르나가 신음을 흘렸다. 더없이 충만하고 질 좋은 신력이 몸을 가득 채웠다. 솟구쳐 오르는 희열감에 자신도 모르게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카누바라크의 몸에서 흘러나온 신력은 포르나의 그릇을 눈 깜짝할 사이에 채워 버렸다. 그러고도 모자라 포르나의 그릇을 강제로 넓히기 시작했다. 그것은 카누바라크의 신력이 워낙 질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포르나는 지금 엑스터시(법열)를 느끼고 있었다. 단계를 깨고 다음 단계로 올라가는 과정에서 순간적으로 느낄 수 있는 엑스터시를 제법 오랫동안 경험하는 것이다.

카누바라크는 무려 수백 년 동안 레어로 기어 들어오는 모험가를 잡아먹으며 신력을 쌓아 온 존재이다. 그 방대한 신력이 고작 네 명의 몸으로 집중되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게다가 오랜 세월 동안 정제된 신력이라 그 질이 매우 높았다. 때문에 흘러나온 신력은 대자연의 품으로 흩어지기보다는 일행의 몸속으로 파고들려 했다.

포르나가 느끼는 엑스터시를 세실리아와 두카 역시 느끼고 있었다. 카누바라크는 현재 그들의 수준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강력한 몬스터이다. 그런 신력을 일시에 받아들였으니 몸이 변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카르고 역시 눈을 감으며 몸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몬스터 사냥을 통해 획득하는 신력은 그에게 힘의 원천이나 마찬가지였다. 카누바라크를 사냥하는 과정에서 소진된 힘과 체력이 급속도로 차올랐다.

그렇게 네 명의 파티원들은 법열의 쾌감을 느끼며 신력을 빨아들였다. 카누바라크의 신력은 네 명의 그릇을 가득 채우고도 모자라 더 넓혀 주고는 자연으로 흩어져 버렸다.

가장 먼저 눈을 뜬 이는 두카였다.

“휘유! 이거 정말 대단한걸!”

온몸이 활력으로 넘쳐흘렀다. 지금의 기분이라면 그 어떤 몬스터도 사냥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우두둑.

목을 앙증맞게 꺾은 두카가 등에 멘 활을 꺼내 화살을 메겼다. 보잘 것 없는 목궁이었고 시위에 걸린 것은 이곳에서 카르고를 기다리며 만든 조잡한 나무 화살이었다. 그러나 시위를 당긴 두카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싸구려 목궁에서 발사된 화살이 아름드리나무의 몸통 깊숙이 박혀 들어가 버린 것이다.

콰지직.

화살의 꽁지깃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나무둥치 깊숙이 틀어박힌 모습에 두카가 입을 딱 벌렸다.

“어디 한 번 더 해 보자.”

김정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