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고-황금의 어스듐 22화

2019-07-15 14:04
아르고-황금의 어스듐 22화
[데일리게임]

“어스듐 라인을 대대적으로 점검해야 한다는 것은 알지만 워낙에 광범위하고 복잡하게 설계되어 있어서……. 거기다 어디에 어떻게 문제가 생겼는지도 모르니까 기술자 한두 명 가지고도 안 되니 예산을 짤 수가 없어. 어스듐 라인 쪽 기술자들은 전쟁 때 망가진 중요 시설물을 보수하는 데 거의 다 투입되어 있어서 말이지.”

“이러다 정말 큰일 한번 날 것 같아요. 성벽에서도 그랬고.”

“안 그래도 성벽 쪽에 비상용 어스듐 라인을 구축하기 위한 공사가 시작된 지 꽤 되었단다. 하루 이틀 안에 해결될 일이 아니니 문제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군요.”

티노는 고개를 끄떡여 보인 뒤 진짜 알아내고자 했던 것을 자연스럽게 꺼냈다.

“친위대 쪽은 괜찮아요?”

“응?”

“씨드가 끊겨도 말이에요.”

“친위대 숙소 쪽은 없지만 감옥에는 비상용 어스듐이 있단다. 염려 마라. 그 플로레스라가 탈출할 일은 없을 테니.”

직접적으로 손을 댄 자가 플로레스라인지 현상수배범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 일에 휘말려서 위험에 처했던 티노가 그중 살아 있는 한 명의 탈출을 염려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테이슨은 자신의 가슴을 과장되게 두들겨 보였다.

“그렇군요!”

티노는 테이슨의 넉살에 호응하듯 활짝 웃었다. 그러며 생각했다.

‘비상용 어스듐이 있단 말이지. 우선 그것부터 손봐야겠는데.’

* * *

그날도 역시나 원석 수거를 하러 나온 티노는 아예 어스듐 교환소를 들르지 않았다. 분명 혼나겠지만 어스듐 교환소를 들를 시간까진 없었다. 어제처럼 뱅커와 수레를 숨겨 놓고 수도를 거닐기 시작했다. 밖에 나올 때면 제대로 무장을 하기에 백팩을 이용해서 보다 빨리 탐색하는 것이 가능했다.

우선 친위대의 위치를 확인했다. 감옥이 있는 곳은 어젯밤에 알아 뒀다. 유명한 곳이라서 주변에 물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게다가 고만고만한 소년소녀들이 꿈꾸는 얼굴로 그곳을 구경하고 있었기에 티노는 그에 묻혀 눈에 띄지도 않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시문의 공방이 수도의 서쪽에 있다면 친위대의 거처는 수도의 중앙에서 조금 비껴 있었다. 그리고 감옥은 친위대의 감옥이라 해도 감옥인지라 수도 중앙이 아닌 북동쪽 끄트머리에 있었다.

친위대의 숙소에서 감옥까지 백팩의 이동밸브를 열어서 빠르게 달려간 티노는 걸린 시간을 기록하고 밸브를 잠갔다. 이 기록을 위해 일부러 친위대까지 가 본 것이었다.

거리가 상당히 떨어졌음에도 감옥에서 왕성이 보였다. 전체가 보이는 것은 아니고 첨탑 부분만 보였지만 어쩌다 보니 그리 된 것이 아니라 일부러 그런 식으로 건물을 배치해서 지은 듯했다. 아마도 감옥에 와 있는 친위대원을 호출할 수 있는 장치가 저 첨탑에 설치되어 있는 것 같았다. 영상전송장치도 있는 마당에 상당히 원시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만에 하나를 대비한 거겠지.

수도 전체에 씨드를 공급하는 대형 어스듐은 수도 위에 높게 떠올라 있지만 비상용 어스듐은 건물의 지하에 감춰져 있기 마련이다. 대형 어스듐에서 씨드가 끊겼을 때를 대신하기에 비상용 어스듐 라인은 일반 어스듐 라인과 이어져 있을 수밖에 없다. 티노가 찾아야 할 것은 그 연결선이 매립되어 있는 구역이다. 어젯밤엔 비상용 어스듐이 매립되어 있는 곳과, 그 근처이되 감옥과 너무 가깝지 않은 위치의 맨홀 뚜껑을 찾아내는 것까지만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날이 밝아 왔기 때문이다.

맨홀 뚜껑을 열어 일반 어스듐 라인이 매립되어 있는 곳으로 내려갔다. 그 안에서 비상용 어스듐이 있던 방향으로 걸어 들어갔다. 몇 번이나 갈림길이 나왔지만 작게 표시를 남기며 계속 들어갔다. 일이 쉬울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스듐 라인은 도시 전역에 거미줄처럼 깔려 있는 것이고, 그것이 악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로처럼 지어 놓기 때문이다.

“쳇!”

길이 막혔다. 티노는 다시 길을 살펴서 되돌아갔다. 그리고 기존에 표시해 둔 것 위에 줄을 덧붙이고 전에 가지 않았던 길로 들어갔다. 방향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가 길이 막히면 되돌아왔다.

그와 같은 과정을 몇 번을 되풀이했는지 모를 때쯤, 마침내 찾아냈다. 램의 공방에도 비상용 어스듐 라인이 있기 때문에 알아볼 수 있었다. 티노가 대형 어스듐에서 씨드를 슬쩍하던 시절에 지하 탐방을 제법 많이 해 본 덕도 있었다. 그 경험이 아니었으면 벌써 방향을 잃고 미아가 되었을 것이다.

“역시 열심히 살다 보면 언젠간 보상 받는 법이라니까.”

굉장히 핀트가 어긋나는 칭찬을 자기 자신에게 하면서 주위를 살폈다. 보통 비상용 어스듐 라인에 경비가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감옥의 것이라 경계했는데 역시나 사람은 없고 철망만 쳐져 있었다. 그 역시도 점검을 위해 자물쇠가 채워져 있는 것이라 문제될 것이 없었다.

일단 비상용 어스듐 라인이 있는 곳을 알아낸 티노는 다시 처음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어제 그곳까지 끌어 온 도둑 회로를 손봐서 안으로 다시 들어갔다. 그것은 수도 곳곳에 깔려 있던 것들 중 하나로 그 흐름을 따라가면 끝에는 무기 제작 공방이 있었다. 유기적으로 하나의 흐름을 가지고 있던 도둑 회로의 일부를 뜯어내어 티노가 원하는 방향으로만 흐르도록 손본 것이다. 이것을 위해 어젯밤 내내 이곳을 탐색하며 도둑 회로를 손봐야 했다.

비상용 어스듐 라인이 있는 곳으로 가는 도중에도 틈틈이 회로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바꿨다. 그러다 보니 길을 찾을 때만큼이나 시간이 오래 걸렸다.

마침내 비상용 어스듐 라인이 있는 곳에 도착한 티노는 우선 자물쇠를 땄다. 그리고 지금까지 끌고 온 도둑 회로를 비상용 어스듐 라인에 연결한 뒤 일반 어스듐 라인을 잘라냈다. 그러자 비상용 어스듐 라인이 가동하기 시작했다.

비상용 어스듐은 일반적으로 해당 기관이 하루를 버틸 양을 모아 둔다. 티노는 무기 제작 공방에서 하루에 소모하는 어스듐의 양과 감옥에서 하루에 소모할 어스듐의 양, 그에 따른 각자의 비상용 어스듐 적재량을 대략적으로 계산하여 여유 시간을 뽑아냈다. 주먹구구식으로 계산한 것이지만 적당히 시간을 끌다 보면 반드시 유사한 시간에 씨드가 끊길 것이다.

티노는 자신이 원하는 때에 씨드를 끊을 필요가 있었다. 밤낮 구분 없이 항시 가동되는 무기 제작 공방은 어스듐 소모가 심하다. 바로 그곳과 연결되었으니 이곳의 비상용 어스듐의 씨드가 바닥나는 건 금방이다. 단, 아직 그쪽에는 도둑 회로를 연결하지 않았다. 그쪽을 연결하는 것은 나중이다.

사실 이런 건 비상용 어스듐 라인을 잘라 내고 일반 어스듐 라인에 소형 시한폭탄을 심어 놓으면 쉽고 정확하게 해결된다. 하지만 그래서는 티노에게 의심이 쏠릴 수도 있다. 그가 무기 제작 장인인 램의 손자라는 것이 언제까지고 비밀로 남겨질 리 없으니까. 티노는 아르카를 구해야 하지만 그와의 약속 역시 지켜야 했다. 절대 둘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을.

그래서 일부러 일을 복잡하게 꼬았다. 수도에 씨드가 끊기기 시작한 것은 벌써 몇 년 전부터 있어 왔던 일이다. 거기에 합류해서 움직이면 모든 혐의는 이 도둑 회로의 주인공에게 몰리게 되어 있다.

티노는 철조망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백팩의 이동밸브를 열어 빠른 속도로 되돌아갔다. 서둘러야 했다. 벌써 돌아갈 시간이 훌쩍 지났다. 원석을 수거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변명도 생각해 둬야 했다.

웨이는 화가 나 있었다. 그는 혼자서 수습 기술자로 3년 동안이나 잡일을 해 왔다. 몇 달 전에 라디가 들어오면서 신참 신세는 면했지만 할 일이 실질적으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라디는 활발하고 부지런하지만 힘이 약해서 그리 큰 도움이 되질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음식만큼은 잘해서 봐줄 수 있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다 티노라는 촌뜨기 꼬마가 들어왔다. 녀석은 세상 물정 모르는 촌뜨기였지만 의외로 공방 생활에 잘 적응했다. 적응 정도가 지나쳐서 처음부터 가르칠 것도 없어 보일 정도였다. 부지런했고 요령을 피우는 일도 없고 보기보다 힘이 센 녀석을 보며 웨이는 이제 자신은 수습 기술자가 하는 잡무에서 손을 떼도 된다고 판단했다.

물론 웨이도 아직까지는 수습 기술자에 불과했지만 그는 저 둘과 급이 달랐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승급할 수 있는 실력이 있었다. 그것은 그 혼자만의 생각도 아니고 다른 선배들도 모두 인정한 사안이었다. 그러니 그는 수습 기술자의 잡무에서 해방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런데도 라디나 티노는 웨이가 아직 수습 기술자라는 것만으로 그를 자신들과 동급으로 여겼다. 잡무보다는 시험 준비를 하는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겼고, 같잖게도 그를 무시하려 들었다. 특히 티노는 자신은 돈을 벌기 위해 온 것이란 소리나 해 대는 생각 없는 놈이었다. 아무리 비주류라 해도 엄연히 이쪽에 뜻을 두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인데 그걸 전혀 존중하지 않는 말이었다.

웨이가 더 열 받는 것은 그런 경솔한 발언을 하는 촌뜨기 꼬마를 다른 선배들이 인정하고 받아 준다는 것이었다. 이 일을 하찮게 생각해서 저런 말을 하는 게 아니라면서, 한창 꿈꾸고 싶은 나이인데 자기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 아니냐는 무른 소리나 해 대면서 말이다!

웨이는 티노가 아무도 훔쳐 가지 않는 원석을 수거하러 가면서 철저히 무장하는 꼬락서니도 마음에 안 들었다. 그럴싸한 무기가 있다고 거드름 피우려는 의도가 그의 눈에는 훤하게 보였다. 다른 사람들이 그걸 눈치 채지 못하는 게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 놓고 어디서 허접한 현상수배범 하나 잡았다고 어깨에 힘을 주는 꼴이 우습기까지 했다. 버려도 안 주워 갈 촌스러운 옷을 입고 수레가 달린 우스꽝스러운 뱅커를 몰고 있는 꼬마를 멍청한 현상수배범이 전혀 경계하지 않았다가 당한 것이 분명한데 그게 뭐가 대단하다고 다들 호들갑을 떠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점점 기고만장해하던 촌뜨기 꼬마가 플로레스라에게 당했을 때도 그랬다. 그게 왜 웨이 탓이냔 말이다. 가기 싫다는 놈의 엉덩이를 걷어차 보낸 것도 아니고, 안 간다고 했으면 그만인 걸 저 잘난 맛에 겁 없이 나갔다 당한 거다. 그런데도 모두가 천방지축으로 날뛰는 촌뜨기 꼬마가 아니라 웨이를 타박했다.

아무리 저급 약을 썼다 해도 어스듐이 섞여 있을 테니 지금쯤이면 어느 정도 아물었을 텐데 과시하기 위해서 계속 붕대를 감고 있는 꼴도 못마땅했다. 녀석의 꿍꿍이야 뻔했다. 그렇게 많이 다친 척 유세를 떨어서 웨이의 평판을 깎아내리려는 거다. 그러면서 그 꼴을 해 가지고 원석 수거하러 나가겠다며 점수 따려 드는 꼴이 같잖았다. 그런 잔꾀를 간파하지 못하는 선배들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다녀왔습니다.”

“티노! 늦어서 걱정했어.”

문 밖에서 티노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라디가 바로 뛰쳐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내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다고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알고 지낸 시간을 따지면 웨이 쪽이 더 오래 됐는데 말이다.

“수거할 게 많았던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3년 동안이나 원석 수거를 거의 도맡아 해 왔던 웨이는 라디의 말이 어이없기만 했다. 수거할 게 많기는 개뿔! 농땡이를 친 거겠지!

“미안! 그게…… 사실은 하나도 못 했어.”

“뭐? 어째서?”

“실은 내내 공원에서 멍하니 앉아 있었어. 그냥 머릿속이 복잡해서. 미안해.”

바깥에서 들리는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던 웨이는 코웃음을 쳤다. 머릿속이 복잡하겠지! 플로레스라와의 싸움에 휘말려 다쳤으니 겁도 났을 테고. 아무튼 이래서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들은 꼭 당해 봐야만 안다니까?

“내일 오늘 몫까지 다 수거해 올게. 미안해.”

“미안하기는! 원래는 쉬었어야 했던 건데……. 그럼 내일은 나도 같이 돌까?”

“아니야. 승급시험이 얼마나 남았다고. 내가 하겠다고 한 일 내가 해야지.”

“그치만…….”

“신경 써 줘서 고마워.”

“그럼 들어가서 쉬어.”

“응, 좀 쉴게. 하던 거 계속 해.”

농땡이나 치고 온 주제에 뭘 했다고 쉬겠다는 건지! 웨이는 어이가 없었다. 세척실로 돌아온 라디에게 한 소리한 것은 그래서였다.

“너 티노한테 관심 있냐?”

“무슨 소리에요, 그게?”

티노가 성벽에서 다친 뒤로는 영 삐딱하게 나오고 있는 라디가 이번에도 날카롭게 반문했다. 웨이의 눈엔 그것이 더 수상해 보였다.

“아니면 왜 그렇게 지극정성인데?”

“제가 뭘요?! 같은 공방에서 일하는 동료이자 친구끼리 걱정해 주는 게 뭐가 이상하다고? 무관심한 웨이 선배가 비정상이죠!”

“걱정도 정도껏이지. 넌 좀 과하게 하고 있다는 건 아냐?”

라디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정곡을 찔려 할 말이 없는 거겠지, 속단하고 웨이는 히죽 웃었다.

“티노는 죽을 뻔했다고요.”

라디가 낮고 진지하게 말했다. 눈물까지 고여 있는 눈이 무겁기만 해서 웨이조차 순간 말문이 막혔다.

“플로레스라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고, 이쪽 병사들과의 싸움에 휘말려 죽을 수도 있었어요. 싸움이 조금만 격해졌어도 분명……!”

라디의 꾹 쥔 주먹이 덜덜 떨렸다. 그 모습에 웨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머리만 조금 다친 것뿐인데 유난이다 싶었다.

라디는 몸을 홱 돌려 나가 버렸다. 웨이는 전보다도 기분이 훨씬 더 나빠졌다. 아무튼 요즘 애들은 어른 공경할 줄을 모른다.

“하아…….”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쉬자 옆에서 동료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벌써 지친 거야?”

“설마.”

테이슨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계속되는 색출 작업에도 이렇다 하게 걸리는 것이 없어서 정신적으로 조금 지친 감도 있지만 내색할 순 없었다.

“조급해하지 말라고. 요즘 이상하게 초조해하는 것 같아?”

“그래?”

신승림 작가